Page 207 - 오산학 연구 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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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3)
부산동의 마을신앙이 이러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일정 부분 경기재인청과 경기도도당굿과의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에 부산동에서 거주하였던 경기재인청의 가계가 부산동 마
을신앙에 끼쳤을 가능성에 대하여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용우 가계가 실제로 부산동에서 언제부
터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확실한 근거자료가 필요하다.
Ⅲ. 경기재인청 가계와 부산동
이번 연구를 통하여 이용우 가계가 언제 오산으로 이주를 하였으며 주소지는 어디였는지 등
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용우 가계는 적어도 1925년 화성군 동탄면 송리에서 오늘날 오산시 부
산동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1931년 원동으로 분가하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 근거들을 이용
우 집안의 족보와 이용우의 호적, 조선무속에 대한 아키바의 기록, 이용우 집안에 전하는 집안
의 문서를 종합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
■ 자료 1. 족보 4)
이용우는 경주이씨 도정공파((尙書公派編 都正公派)로 족보를 통해 확인한 바는 다음과 같다.
3) 화성시의 당성에 올라 현재의 모습으로 천년전의 모습을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된다. 이는 적어도 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교류
하였던 그 지점에서 당성의 모습을 보고 들판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지금은 들녁이지만 당시에는 바다였다. 그러니 원효와 관
련하여 평택과 화성이 서로 주장하는 바는 비단 우리의 문화적 역사적 인물을 원효를 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원효는 전국 도
처에 그의 기행과 이적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며 그리하여 전국 도처가 원효에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화교섭으로 보는 경기만」, 김용국. 『경기만 포럼』. 2017
4) 경주이씨 대종보 권지사십육, 1973년 삼월 삼십일일 인쇄, 1974년 4월 이십일 발행
부산동 마을신앙의 의의 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