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8 - 오산학 연구 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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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 이용우의 가계도 <정리 김용국>
圭
仁
鍾 鍾 鍾
文 萬 河
春 楚 榮 喆 德 龍 興
吉 玉 雨 雨 雨 雨 雨
玉 相 相 相 相 今 今 相 明 相 玉 玉 玉 玉 玉 玉 相 相 相 相 相 相 相 玉 福 福 相
順 勳 敦 根 滿 順 玉 德 子 玉 京 姬 順 蓮 花 分 間 甲 學 禮 烈 範 均 禮 琴 禮 俊
그런데 족보의 기록과 집안에서 전해지고 있는 문서의 내용에 차이가 있어 어느 것을 신뢰하
여야 할 것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여러 입장과 상황을 고려하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5)
그 하나가 집안에 전하는 문서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으나 족보의 기록과는 차이를 보이는
점이다.
“叔父 名 鍾자요 子 無子하여 龍雨가 제를 밧들게 되여다. 그리 알고 지내라 祭日 十一月 初七日. 叔母
海州吳氏 祭日 十二月 初九日.”
그런데 족보의 기록에서 보듯 제일이 다르게 나타난다. 6)
7)
“龍雨氏는 次子요 長子는 興雨氏가 長子인데 子 옥환이란 아덜 一子를 두고 세상 떠나가 후버 龍雨
가 先祖에 祭行을 모서라. 興雨氏의 子는 日本어디로 가 세상을 떠낫다. 死亡되여다. 그시부터은 長孫
5) 무업이라는 것이 단골판을 갖고 있기는 하였겠으나 여러 곳을 다녀야 하는 특성이 존재한다. 그러한 저간의 사정을 감안하면
족보를 정리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를 들여 후사를 잇는 사례도 여러 집안에 두루 존재하던 풍습
이었던 바 족보의 기록과 집안의 기록이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러한 때문이라 여긴다. 여기에 더하여 호적의 경우도 족보와는
차이를 보이는 바 이 또한 무속을 업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지녀야했던 한계이고 아픔이 아니었을까 한다.
6) 족보에는 李鍾萬 一八七○年 庚午 九月 二日 生, 忌 十一月 十九日. 墓는 華城郡 東灘面 金谷里 共同墓地. 配 海州吳氏
一八七四年 甲戌 九月 四日 生 忌 十一月 十日. 墓는 合窆.
7) 후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작은아들 또는 차자(次子)의 의미일 것으로 보인다.
206 김용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