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7 - 오산학 연구 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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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하는 경안천은 용인, 성남을 거쳐 한수(漢水)에 합류한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의 “생각하
건대 이 河南의 땅은 북은 漢水를 두르고, 동은 高岳에 의지하였으며, 남은 沃澤을 바라보고, 서
로는 大海를 격하였으니”에 일치한다.
용인 부아산 아래의 지명이 흥미롭다. 신갈, 구갈, 상갈, 하갈이다.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
도로가 사통팔달로 갈라지는 갈래길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비류와 온조가 갈라선 길, 한수(漢
水)와 팔하(八河)를 가르는 산마루의 의미도 담겨있다고 판단한다.
<도판 23> 부아산 <도판 24> 할미산성
9) 직산(稷山) 위례산성(慰禮山城)
용인 부아산을 내려온 비류와 온조 일행은 갈라섰다. 비류는 따라온 백성을 반으로 갈라 미추
홀로 가고, 온조는 하남으로 갔다. 이때 소서노는 용인 부아산 아래의 궁촌(궁말)에 머무른 것으
로 추정된다. 비류가 도읍을 세운 해빈 미추홀과 온조가 도읍을 세운 하남 위례성의 중간지점이
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백제 온조왕의 社稷을 기려 ‘溫祚王祠堂’을 세운 곳은 직산읍 군서리였다.
이후 조선 세종 이도가 쇠락한 ‘溫祚王祠堂’을 다시 세웠다. 왕건과 세종이 직산에 ‘온조왕사당’
을 세웠다는 것은 충청남도 직산읍이 백제 하남 위례성이라는 확실한 근거다.
온조왕 14년 1월, “왕이 하남(河南)에서 한산(漢山)으로 국도(國都)를 옮겼다. 7월에는 강서북
에 축성하고 한성(漢城)의 민호(民戶)를 그리로 옮겼다.”
왕이 하남(직산)을 버리고 한산(한산)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두 가지 사건에 기인하였다고 판
단한다. 그 하나는 왕모 소서노가 五虎로 불리는 강경파에 의해 제거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오산거북놀이에 담긴 백제 건국 세력의 남하 흔적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