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9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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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호항골(胡降谷)
호항골은 종루봉(비로봉)과 형제봉이 이루는 골짜기다. 상호항골(上胡降谷)과 하호항골(下胡
降谷)로 구분된다. 상호항골(上胡降谷)은 신봉동에서 토끼재(兎岾)로 오르는 골짜기이고, 하호
항골(下胡降谷)은 신봉동에서 마재(馬岾)로 오르는 골짜기이다. 청군이 종루봉과 형제봉을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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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고 오르다 수백 명이 사살된 곳으로 알려진다. 향토사학자 이석순 은 항골(航谷)과 호항골
(胡降谷)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항골의 유래는 언제인지 모르는 아주 옛날에 수지 일대는 물바다였고 오직 형제봉과 가운데
봉 그리고 광교산(수리봉,시루봉)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때 형제봉과 가운데봉 사이로 배가
다녔다고 해서 항골(航谷)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전설이 또 하나 있는데 이는 형제봉 절벽 밑에 배를 붙들어 매었던 고리가
있었다고 하며 이를 보았다는 사람도 몇 명 있다. 이렇게 배를 매었다면 항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는 항골(港谷)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골짜기 바로 너머에 병자호란 때 전라병사로 용인 전투에 참전했던 김준용 장군의
전적비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이는 수원성 성축 공사의 책임자였던 번암 채제공 선생이 부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는 이곳에서 김준룡 장군이 청나라 병사를 항복 받은 자리라고 해서 항호곡(降胡谷)
즉 오랑캐가 항복한 골짜기라는 유래를 듣고 비를 새겼다고 전하며 항호곡이 줄어 항골이 되었
다고 하는 말도 있다.
필자는 항골(航谷)과 호황골(胡降谷)을 여러 차례 답사하였다. 그리고 그 차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항골은 항골(航谷)이다. 그러나 형제봉이 물에 잠겨 배가 떴다는 전설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
데 배를 매어 두었다는 쇠고리가 형제봉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문고리처럼 생긴 둥근 쇠고리였
다는 것이다. 90세를 넘긴 마을 노인들이 보았다는 증언이니 거짓일 리 없다. 필자도 여러 차례
답사하였으나 둥근 쇠고리를 찾지 못하였다. 누가 고물로 가져간 것인지 필자가 찾지 못한 것인
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형제봉을 돛대바위로 본다. 배를 묶었다는 고리는 돛대에 깃발을 매달던
43) 이석순, 앞의 책.
광교산전투, 김준룡장군 전승지 답사기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