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0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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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로 본다. 설명을 덧붙이면 형제봉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장수가 산 아래 군사들에게, 또는
맞은편 수리봉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연락을 취하던 신호수단으로 본다. 바다에서 해군들이 신
호하는 깃발을 떠올리면 이해될 것이다. 태극기를 다는 국기 게양대를 상기하면 정리 될 것이
다. 국기 게양대의 위아래에는 둥근 원형의 도르래가 달려 있지 않은가! 실제로 형제봉 8부 능
선의 바위 암벽은 군함의 뱃전과 흡사한 형태를 보인다.
호항골은 호항골(胡降谷)이다. 상호항골과 하호항골로 구분된다. 호황골(胡降谷)은 호로군(胡
虜軍)이 항복한(降) 골짜기(谷)라는 의미로 파악한다. 필자는 이와 유사한 근거를 6.25 한국전
쟁의 격전지 파로호(破虜湖)에서 찾는다. 국군에 쫓긴 중공군이 몰살한 소양강의 다른 이름이
파로호(破虜湖)다. 여기서 로(虜)는 곧 호로병(胡虜軍)을 가리킨다.
항골과 호항골의 음가는 비슷하나 골짜기의 위치가 분명히 다르다. 다음지도 카카오맵은 호
황골을 줄여서 황골로 표기한다.
수리봉에 오르면 산밑 사람들의 움직임이 똑똑하게 관망된다. 그러나 광교산 전투 당일의 날
씨는 눈이 오고 매우 흐렸다. 그러므로 적군과 아군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없었다. 이에 청
사령관 예친왕 다탁은 뿔나팔을 불어 좌익장 양고리의 등산을 독촉하였고 그래서 양고리는 호
항골로 군사들을 진격시켰을 것이다.
청의 장수 양고리를 먼저 알아본 것은 충청근왕병이었을 것이다. 전라근왕병에 편입된 보령
무장 인발의 병사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험천 전투에서 전사한 전우들의 복수를 이를 갈며 다
짐했을 것이다.
보령 무장 인발과 충청근왕병이 전사한 곳은 서봉사지 앞의 호항골(胡降谷)로 확인된다. 광교
산 전투 후, 광교산의 어느 스님이 호항골의 시신을 산에 묻었다. 그러다가 호패를 보고 보령 무
장 인발의 시신인 것을 확인하였다. 보령으로 부고를 보내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갔다는 사
실에 근거한다. 44)
44) 교동 印씨 대동회 홈페이지. http://www.kyodongin.com/skin/
98 임종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