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5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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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과 충돌하여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또, 장군의 인자한 성품은 홀로 계신 노모를 극진히 받들

                수 있었고, 어버이를 일찍 여읜 조카들을 친아들같이 사랑할 수 있었다.


                 다음은 선조 31년(1598년) 11월 1일, 선조실록의 기사다. 이순신 장군을 따라 해전에 참전하였

                던 조카 이완(李莞) 장군의 일화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의 일이다.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하고, 말
                을 마치자 절명했다. 순신 형의 아들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알지 못했다. 진린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자 완은 그의

                군사를 지휘해 구원하니, 적이 흩어져 갔다.


                 舜臣曰: 戰方急, 愼勿言我. 言訖而絶. 舜臣兄子莞秘其死, 以舜臣令, 督戰益急, 軍中不知也 陳

                璘所乘舡爲賊所圍, 莞揮其兵救之, 賊散去


                 이순신 장군의 가문은 문무겸전의 양반가였다. 고려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이돈수(李敦守),

                조선 영중추부사와 홍문관대제학을 지낸 이변(李邊)이 가문을 빛낸 인물이었다. 어쩌면 선대 이
                돈수의 수(守), 이변의 변(邊)의 기운이 이순신 장군에 그대로 전수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

                다. 이순신 장군의 일생이 곧 변방을 굳게 수변(守邊)한 삶이었기 때문이다.
                 왜란에 임하여 장군은 자신의 칼에 三尺誓天山河動色, 一揮掃蕩血染山河의 글귀를 새겼다.
                또한 난중일기에 必死卽生 必生卽死의 결심을 새겼다. 장군이 전사하자 장군을 따르던 병사들

                이 타루비(墮淚碑)를 세워 슬퍼하였다. 광교산 용마등(龍馬騰)이 낳은 인물, 이순신 장군이 아니
                면 그 누구이겠는가!

                 이백록 공의 묘소는 광교산 시루봉(수리봉)의 동쪽 장군봉 아래에 위치한다. 시루봉(수리봉)
                을 주산으로 보면 백운산과 진재산 줄기가 좌청룡이고, 종루봉과 형제봉 줄기가 우백호가 된다.
                종루봉을 주산으로 보면 수리봉이 좌청룡이 되고 형제봉이 우백호가 된다. 그 기운이 대단히 웅

                위하고 아름다운 천하의 명당이다.
                 필자는 광교산 용마등 전설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용마등이 낳은 영웅은 충무공 이순신 장
                군이다. 조선은 물론 明(중국)과 倭(일본)에 그 이름을 떨친 성웅이다.








                                                              광교산전투, 김준룡장군 전승지 답사기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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