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4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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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李貞)의 상소에 대한 의결을 보면 평시서봉사 이백록의 파직 사유는 분명하다. 시전의

               무뢰배들과 멋대로 어울려 술을 마신 사건이 아니라, 중종의 국상(國喪)에 아들의 혼례 잔치를
               벌인 것이 파직의 사유였다. 형조의 사건 조작과 사간원의 보고에 의해 파직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이백록은 용인으로 쫓겨났고 이정은 벼슬에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이 억울함

               을 바로잡고자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이에 의정부(議政府)가 이백록의 무죄를 의결하여 왕에게
                                                        50)
               보고하였고, 명종이 승정원에 통보하여 녹안(錄案) 에서 이름을 지우도록 한 것이다.
                이정(李貞)이 이백록의 신원(伸冤)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 때는 1545년 4월 □일이었다. 이백
               록이 위중한 병환이거나 사망한 때이었을 것이다. 살아서 누명을 벗어야 죽어서도 恨이 되지 않
               는다. 그래야만 아비 이백록의 묘비도 제대로 세울 수 있고 자신도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는 것

               이다.
                그런데 1545년은 이순신이 태어난 해다.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 공이 사망하여 광교산 수리봉
               동쪽 능선에 묻힌 바로 그해 4월 28일이다. 기묘한 일이다.

                이백록 공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20-1 장군봉 아래다. 장군봉 주변에는
               이순신 장군의 맏형 이희신(李羲臣), 큰조카 이완(李莞) 장군의 묘소도 위치한다. 그러므로 용인
               시 고기동은 이순신 장군의 고향이 되는 것이다. 또한 광교산이 낸 용마등 전설의 주인공이 되

               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쇠락한 가문의 가세는 되살아나기 힘들었다. 이에 장군의 아버지 이정(李貞)은

               또다시 충남 아산으로 낙향하였다. 이순신의 외가인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였다. 순신
               의 나이 10여 살 때였다. 이순신과 같은 건천동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
               이순신 면모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용모가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

               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
               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꺼려 감히 이순신의 문 앞을 지나
               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또 말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재(詩才)에도 특출하였다.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면서도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강한 정의감은 관직에 있을 때에 상




               50) 녹안(錄案), 조선 시대에 삼강과 오상을 위반한 죄인의 이름을 기록한 장부.



               102  임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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