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2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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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술사를 몰래 보내 이곳의 혈을 끊으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했는데 이는 용마등
바로 옆에 있는 서봉사 승려들에 의해 이곳이 보호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으로 서봉사가 소실되고 승려들이 몰살당하면서 왜적과 명군에 의해 이
명당의 혈이 훼손되고 말았다. 그때 혈 끊은 자리에서 붉은 피가 솟아 신봉천이 넘쳤다 하며 장
수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던 용마는 슬피 울며 헤매다 굶어 죽었다고 한다.
아직도 이 산허리에는 혈을 끊은 자리가 4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깊이 패어 남아 있다. 그리고
서봉사 근처에는‘송장거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곳은 당시 왜적이 승려들을 죽여 널어놓
았던 곳이다.
용마등 전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현장을 확인하여야 한다. 그래서 필자도 용마등을 여러 차
례 답사하였다. 그 결과 이석순이 채록한 내용과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
다.
하나, 용마등의 지세는 하늘로 승천하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끊어진 혈자리는 목이 아니라 꼬
리 부분에 해당한다. 용이나 물고기 꼬리 부분은 잘록하다. 용마등의 꼬리 부분이 움푹 들어간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다.
둘, 용마등(龍馬騰)의 등(騰)은 ‘말을 타다’, ‘높은 곳에 오르다’의 의미다. 종루봉(중앙봉)을 잇
는 산 능선이 이미 말안장의 형태다. 이곳의 지형이 그러하고 이곳의 지명이 마재(馬岾)인 것이
그 증거다.
셋, ‘용마등은 천하를 호령할 영웅을 낳을 명당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까지 호령
할 인물을 배출할 명당’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전설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 이미 광교산에서 출
현하였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이 광교산 정기
를 받고 태어났다는 말인가? 필자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이순신 장군은 1545년(인종 1) 4월 28일(음 3월 8일), 한양의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하였
다. 아버지는 이정(李貞)이며, 어머니는 초계(草溪) 변씨(卞氏)이다.
장군은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이돈수(李敦守), 조선 때 영중추부사와 홍문관대제학
을 지낸 이변(李邊)의 후손이다. 대대로 문관과 무관 벼슬을 이어온 양반계급의 집안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가계가 기운 것은 조부 이백록(李百祿) 때였다. 시전(市廛)의 상도의(商道義)를
46)
바로잡아야 할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 이백록(李百祿) 이 시전의 무뢰배들과 어울려 술을 마
46) 이백록(李百祿), 용호한록 2권(龍湖閒錄二)의 제6책(冊) 319면의 동국문헌명신편(東國文獻名臣篇).
100 임종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