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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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 금번조사에서 노출되었던 계단식석축석렬은 층위상 가장 늦은 시기까지 노출되어 있었
던 성벽과 관련된 시설로 판단되어 진다. 일반적인 조선시대 산성의 성벽은 석축의 축조방식은
다소 조잡하더라도 크고 작은 할석을 허튼층으로 쌓아올리는 양상이 확인되며, 대체로 수직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계단식으로 성벽을 축조한 것은 일반적인 성벽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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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이 있다. 이러한 계단식 석축석렬의 사례가 현재 많지 않으나, 남한산성 , 산성산성 에서 확
인된 것과 유사하다. 남한산성에서 확인된 것은 암문 하부에서 확인된 것은 기단 보축성벽으로
보고되었으며, 40~50단이며 높이는 10m정도이며 층단을 이루며 축조되었으며, 17세기 무렵
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치성 동쪽부 치성벽 하부에서도 기단보축성벽이 확인되었는데
43단정도이며 높이는 8.2m정도이다. 북한산성에서 확인된 것은 부왕동암문 성벽 하부조사에
서 확인되었으며 계단식 석축으로 보고되었다. 폭은 최대 7m 정도이며, 높이는 약 4m 정도 확
인된다. 조선시대 성벽와 함께 축조된 것으로 본다면 17세기~18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
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독산성의 계단식석축시설은 이들 성곽의 영향을 받아 축조가 이루어
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로 조선시대 문지와 생활공간의 변화이다. 북문지는 크게 2차례의 변화가 확인되는
데, 하층의 문지와 상층의 현 북문지로 구분된다. 하층의 문지는 현재 북문지 하부에서 확인되
었다. 북문지[하층]은 동서 양쪽 측벽과 바닥면 일부만이 확인되었다.
13) 1831년,1860년 문헌기록에 의하면 성의 관리상태가 좋지 못했으며, 풍천유향에 의하면 “주먹만한 돌과 흙덩이로 낮게 쌓았
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보로 걸어서도 올라갈 수 있는 상황에 있으며, 여장의 높이가 겨우 몇자에 불과하여 그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고, 총안이 지나치게 크며 포혈을 어지럽게 뚫어놓아 아이들 장난과도 같으니..” 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시대 19세기에는 이미 성벽의 잔존양상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14) (財)中原文化財硏究院, 2007, 『南漢山城-암문(4)·수구지 일대 발굴조사』
15) (재)경기문화재연구원, 2018, 『사적 제162호 북한산성 성벽 및 부속시설 3차 발굴조사』
오산 독산성 북문지 일원 조사성과와 변화양상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