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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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층의 문지의 외부에는 2~3단의 계단을 조성하여 등성시설이 확인되며, 이후 북문지가 조
성된 후 계단식석렬의 기저부보강층 상면을 이용하면서 평탄화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성 내부에서는 조선시대 후기층이 확인되었으며 두 차례 이상의 대지조성층이 확인되었으며,
그와 맞물리는 건물지 및 부속시설들이 중층양상으로 확인되었다. 먼저 ①조선시대 하층[하층
문지+건물지 (1~3호)3기, 배수로 1기, 수구 등]으로 하층 문지를 중심으로 사용된 시기이다. 주
로 대형의 건물지들이 축조되었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유구의 하부에 부분적으로 노출되고 있
어 전체적인 양상의 파악은 어려운 상태이다. 문지와 일정간격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성벽
이 구체적으로 기능하고 있고, 이에 따른 성곽의 관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
인다. 이후 ②북문지를 좁혀 쌓으면서[북문지 상층, 현재의 북문지] 등성시설을 축조하고, 4·5
호 건물지를 새로 조성하였다. 2·3호 건물지는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③이후 성벽 및 등
성시설을 해체하거나, 건물지 상면을 이용하여 부분적으로 해체하여 소규모 생활유구[주거지,
야외노지, 석조유구 등]가 조성되어 크게 3차례 이상의 공간적인 변화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
16)
정된다. 성 외부에서 확인되었던 주거지와 집수시설, 우물 또한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
단된다. 북문지가 좁혀지고 이와 관련된 유구들의 축조양상이 이전 시기에 비해 조잡하거나, 이
전 시기의 유구를 파괴하고 조성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볼 때, 성곽의 관리 및 보수방식이 기
존과 달라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북문지 일대의 공간의 변화는 성 내 유구 상면을 바로 이용하고 있고, 중복된 유구들
사이에서 유물이 대체로 대동소이한 것으로 볼 때, 오랜 폐기기간이 없이 지속적으로 이용되었
던 양상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1831년과 1860년 문헌 기록에 의하면 성의 상태
가 양호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 후기로 갈수록 독산성의 관리가 부
실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벽에 바로 인접하여 내·외부에서 시설이 조성되는 것도 관리
가 소홀해지고 관방의 기능이 다소 축소되는 것과 연관되어진 모습이 조사결과와 동일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6) 일반적인 조선시대 우물과는 축조양상이 매우 틀려 우물로 판단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으나, 조사지역 구릉 하단부에서
지속적으로 지하수가 용출되고 있으며, 우물로 명명한 석축시설 내에서도 물이 계속 용출되어 약 30분내에 물이 가득차는 양
상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풍천유향에 의하면 “성안에는 비록 6~7곳의 작은 우물이 있기는 하지만, 조금만 가물면 곧 물이 말
라버린다. 그러므로 성안에 있는 민가들도 평상시 성문 밖에 나가 물을 길어다가 조석을 해결하고 있는 형편이다. .. 성 밑에
서 멀지 않은 지역에 샘물이 솟아나오고 있으며, 동, 남. 북에는 마르지 않는 식수원이 있는데, 지형을 보면 본성보다는 약간
낮은 듯하지만 바라볼 때에는 또한 꽤 높고 험준하다. 만일 그 지형을 따라 얕은 담장(우마장)을 빙 둘러쌓아서 물긷는 길을
통하게 한 뒤에 비밀통로를 내어서 적이 우리의 태만한 틈을 타 공격하는 것을 방비하게 한다면...”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금번 조사지역에서 확인된 내용과 유사한 시설로 보여 우물로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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