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8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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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오산 독산성 1호 건물지는 위 성랑이나 군포와 유사한 시설로 추정되며, 이는 축대가

               신설되는 그 기간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즉 독산성에 대한 대규모 보수나 정비가 이루
               어질 때 건축된 것으로 보이며, 독산성 수축과 관련된 기사는 다음과 같다.




                   京畿觀察使柳根馳啓曰:  "水原  禿城山城修築事,  今月十一日始役,  十四日畢
                 役. 參商事勢, 訪得民情, 禿城城內, 募入人民, 中設倉廒, 以爲積粟之計, 而

                 第慮水原多土豪, 以築城之役, 胥動浮言, 或以難成云. 寬民之力, 固是今日第
                 一急務, 而生道使人, 亦不可已, 不得已督令畢役矣.(宣祖實錄 55券, 宣祖 27
                 年 9月)

                   戊辰/修禿城山城.  [城周一千四步,  體城新築七百三十二步,  修築二百七十二
                 步. 水門三改築, 女城三百九堞新築, 南將臺移舊基三尺改建.] 敎曰: "山城重
                 地, 密邇於園寢, 又是庚辰駐宿之所也. 將臺卽鎭南樓, 而昔年登臨之所也. 今

                 聞修葺云,  當製下碑文.  原任閣臣中,  左相書進."(正祖實錄  36券,  正祖  16年
                 10月)




                우선 선조대에 4일간에 걸쳐 수축을 하였으며, 정조대에는 7백 32보 신축하였고, 2백 72보

               수축, 수문 3곳 개축, 여장 3백 9보 신축, 남장대는 3척 이동하여 신축하는 등 대규모 수축을 하
                                         10)
               였다. 또한 이 남장대는 진남루 이며, 정조가 올랐다고하여 더욱 주목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독산성을 19세기 말까지 크고 작은 보수와 수축이 이루어졌으며, 1831년 화성유수 박기수에 의

               해 3개월간 중수되기도 하였다. 독산성은 정조대에 대규모 수축이 행해졌으며, 이 시기를 기점
               으로 축대가 조성되었을 가능성과 숙종대에 봉수대를 설치하면서 다른 산성들과 마찬가지로 함
               께 일부 정비되었을 수 있다.
















               10) 이용범, 2017, 「독산성 진남루 위치에 대한 재검토 – 문헌기록을 중심으로」, 『오산학연구』 3.



               66  노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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