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9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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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지시에 중국 보따리상들이 칼 같이 줄을 서고 번개 같이 짐을 나른다. 그 옛날 해상왕 장
보고의 눈짓 손짓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을 모습을 오늘도 연출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산동반도의 남자들을 ‘따한(大漢)’으로 부른다. 따한이란 ‘키 크고(大) 씩씩한 사나
이(漢)’의 의미이다. 요즈음의 말로 ‘엄지척’으로 불리는 잘난 사나이를 가리킨다. 따한으로 불린
이들이 신라방에 거주하였던 신라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신라인 장보고(張保皐)와 정년(鄭
年)의 불꽃같은 청춘은 아니었을까?
적산포(석도항)에 도착한 상선은 이후 북행하여 등주의 威海-烟台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
고 태산 남쪽의 濟南-공자의 고향 曲部-사통팔달의 고도 鄭州-당의 수도 西安(長安)의 길을
따랐을 것이다. 그 먼 길을 말이나 낙타 또는 마차를 타고 여행하였을 것으로 판단한다.
산동성 연태시(烟台市)는 무역항으로 이름난 도시이다. 연태시의 이름은 봉화를 올리던 봉수
대에서 유래하였다. 연태산 봉수대에 오르면 동중국해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도-11. 연태시의 봉화대
신라의 왕성에서 남양반도의 당항성(당주), 산동반도의 등주에 이르는 길은 신라의 씰크로드
였다. 산동반도 등주에서 제남-곡부-정주-장안에 이르는 길은 당의 씰크로드였다.
원효가 成道한 당주계 樴山의 토굴무덤 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