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3 - 오산시 지명과 유래
P. 63

밭들로  오랫동안  채소  등의  작물을  재배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건축에  쓰

                  일  모래를  채취하면서  없어졌으며,  오산천이  흐르는  곳에  섬처럼  생긴  밭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었다.



                  ■  남촌대교(다리)



                  오안교라고도  하였으며,  지방도  302호선에  위치한다.  남촌에서  발안  방면의  오산천
                  을  건너는  다리로  연장  110m,  폭  25m로  1991년에  준공되었다.  그런데  이  다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무다리로  되어  있었으며  그것을  6․25한국전쟁  이후  시멘트  다리
                  로  놓았다가  다시  1991년  현재의  다리로  다시  놓은  것이다.



                  ■  뚝방(둑)



                  오산천을  끼고  내려가는  긴  둑을  이르는  말이다.





                  (3)  궐동(闕洞)






                  ■  궐동(마을)



                  오산화성궐리사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궐동의
                  범위는  매우  넓어  오산천변의  북쪽을  경계로  하여  남촌동으로  된  대호밭,  궁터도
                  궐동이었다.  특히  궐동의  지명은  오산화성궐리사가  생기면서부터이기  때문에  아주

                  오래된  마을이다.  우리나라에서  궐리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사당은  단  두  곳으로
                  하나는  오산시의  화성궐리사이고,  다른  하나는  논산시의  노성궐리사이다.  ‘궐리’란
                  공자가  살았던  노나라  곡부의  향리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오늘날  오산시  궐동의  유
                  래도  여기에서  찾아진다.  오산화성궐리사는  바로  공자의  가르침을  알리고  배우기
                  위해  설립된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것이다.  정조가  칙명으로  오산화성궐리사가  건

                  립된  이곳은  처음에는  서원(서당)이었다.  이  서원을  만든  사람은  조선  중종  때의  경
                  기․황해  감사와  대사헌을  지낸  공서린(孔瑞麟,  1458~1541)으로  공자의  64세손이다.
                  공서린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사우  앞뜰의  은행나무에  북을  매달아  두고  문하
                  생들의  학문을  격려하고  독려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나자  이  은행나무도
                  자연  말라  죽고  말았다.  그  뒤  정조  16년(1792)  10월  3일  정조가  전교를  내려  오

                  산화성궐리사를  다시  건립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4월  정당(正堂)과  동․서재가  준공





                                                         -  63  -
   58   59   60   61   62   63   64   65   66   67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