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 - 오산문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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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학 이야기






           함께 2021년 10월 27일에 경기도 등록문화재 제3               위치가 쉽게 드러나지만, 죽미령은 오산 북쪽에 얕
           호로 지정되었다.                                    은 구릉으로 형성된 지형이어서, 수원에서 오산으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초반 5일간 북                  로 들어오는 움직임이 쉽게 파악 가능하고, 북한
           한군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6월 28일에 서울을 점                  기갑부대의 기동력이 떨어지는 장점이 있다. 또한
           령하고 7월 4일 수원을 점령하였다. 경기도에서 삼                 죽미령을 중심으로 1번 국도와 경부철도가 위치하
           남으로 이어지는 오산만 통과하면 북한군은 충청                    기 때문에 탱크를 주 무기로 하는 북한군은 죽미

           도와 경상도, 전라도를 순식간에 점령할 수 있었다.                 령을 지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시작된 6월 25일 UN 국가안전보장회의는                  7월 5일 새벽 3시 스미스부대는 1번 국도를 중심으
           북한에 대한 전쟁 중지 요청과 38도선 이북으로의                  로 동쪽 반월봉 북사면의 99고지(오산 유엔군 초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 제82호를 체결하고, 미국은                  전기념비 옛 자리)와 117고지에 B중대를 배치하여

           38선 이남 지역에 대한 해·공군의 참전을 결정하                  그 사이에 있는 경부국도를 방어하였고, 도로 건너
           였지만, 북한군의 남침은 계속되었다.                         편 92고지에 C중대를 배치하여 경부철도를 방어
           당시 상황을 정찰한 조사단은 지상군 투입 없이는                   하는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반월봉 남쪽 낮은
           북한군의 축출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였고, 수원                    구릉에 C중대 1개 소대를 배치하고 포병부대는 수

           에 도착한 맥아더는 보고 내용을 토대로 38선 이                  청리에 배치하였다.
           북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6월 29일                오전 7시 수원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의 소련제
           미 합동참모본부는 가장 가까운 일본에 주둔하고                    T-34전차를 발견하였고, 전차가 2㎞ 가까이 접근
           있던 제8군사령관에서 제24사단의 파견을 명령하                   하자 오전 8시 16분에 105㎜ 야포 포격을 시작으

           였다. 이는 UN군사령부가 설치된 7월 24일보다 한                로 75㎜ 무반동총, 2.36인치 로켓으로 공격을 개시
           달여 앞서서 파견을 결정지은 것으로, 북한군의 대                  하였다. 각종 공격에도 북한군의 전차부대는 별다
           대적인 병력사항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소수의                    른 타격을 받지 않고 통과하였다. 그리고 한 시간
           스미스부대만으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킬 수                     뒤에 10㎞의 트럭 행렬과 5,000여 명의 보병대열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남진하였다. 적은 반월봉 정면과 99고지, 92고지
           미 제8군 제24사단 제21연대 소속의 스미스중령                  일대를 포위하여 전투를 개시하였다.
           은 제1대대의 보병 406명과 제 52포병대대의 포병                스미스부대원들은 전력으로 전투에 임했으나 수적
           134명으로 구성된 특임부대를 꾸려서 1950년 7월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다. 스미스 중령은 14시 30

           1일 일본에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7월 4                 분에 퇴각을 결정하였다. 이 전투로 스미스 부대원
           일 평택에 집결한 뒤 스미스중령은 3차례의 지형                   중 56명은 전사하였고, 89명의 포로 중 50명은 송
           을 정찰한 뒤 작전지역을 오산의 죽미령으로 판단                   환되었으며, 39명은 사망하였다.
           하였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스미스 특임부대원들의

           평택은 너른 평야가 이어진 지형으로 적과 아군의                   희생 덕분에 북한군의 남침 속도를 현격히 늦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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