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 - 오산문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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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VOL. 73 osan culture
수 있었다. 본래 북한군은 19일 안에 낙동강전선까 기단 위에 탑신은 총 540개의 돌로 만들어졌는
지 진출할 계획이었으나, 스미스특임부대와의 전투 데 이는 오산 죽미령 전투에 참전한 스미스부대원
로 UN군의 참전을 알게 되자 전과 같은 속도로 남 540명을 상징하고, 기단에 부착된 석판에는 다음
하를 진행할 수 없었다. 죽미령전투 이후 북한군은 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포병을 집결해서 부대를 재편성하고, 공격 이전에
정찰과 부대 정렬의 시간을 소비한 후에 전투를 개 1950년 7월 5일 이 자리에서 미 제24보
시하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82일 만에 낙동강에 도 병사단 소속 제21보병연대 및 제52야포
착하였고 그동안에 UN군과 남한군은 낙동강 방 대대 A중대로 구성된 스미스 전투부대
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406명의 장병이 미합중국 군대와 공산
침략군간의 최초의 전투를 개시했음을
그러나 이 전투의 진정한 의의는 유엔 창설 이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노라
처음으로 유엔의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자유와 평
화를 수호하기 위해 유엔군이 처음으로 참여한 전
투라는 데 있다. 본래는 석판이 아닌 동판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휴전 이후 1955년에 미 24사단은 전우의 희생을 1963년에 첫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의 신문기
기리며 돌을 쌓아 “유엔군 초전 기념비”를 제작하 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고 죽미령 전투 제5주년 추도식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1964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 동판을 되
1963. 4. 30 경향신문 기사
자취 감춘 충혼탑연혁판
수원서 잇닿은 간판도난사건
수원과 화성에 있는 충혼탑의 연혁판과 「유엔군초전기념
탑」의 부대표지를 비롯하여 수원시내 소화국민학교의 간
판, 그밖에 4개처의 동판으로 된 간판 등이 감쪽같이 없어
졌다.
충혼탑은 젊은 영현들의 공훈을 높이 찬양하고 후세에 남
기기 위해 경기도민이 세운 것으로 뒷면의 연혁판(가로 70
센티, 세로 40센티, 두께 1센티)이 없어졌고 초전기념탑은
미제24사단 장병들이 세운 것이다.
※신문기사에 없어진 동판을 ×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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