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7 - 오산학 연구 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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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한다. 이 성을 어느 때 어떤 목적으로 쌓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대동

                야승』 제8권 54호에 “이 성은 할미성인데 구전하는 설화가 있다.”는 간단한 기록이 있을 뿐이
                다. 7)



                 할미산성 설화는 용인군지(龍仁郡誌), 구성면지(駒城面誌), 포곡면지(蒲谷面誌) 등에 실렸다.
                구전 채록에 의한 기록으로 그 내용은 구술자마다 마을마다 조금씩 다르다. 할미성대동굿 전수
                                                    8)
                자인 유성관이 구술하는 용인 할미산성 설화 는 다음과 같다.

                    b-4. 옛날 아주 옛날에 슬하에 남매를 둔 노부부가 있었다. 노부부는 아홉 해나 가뭄이 들어 슬하의 자
                    식 한 명을 죽여야 하는 형편에 놓였다. 이에 노부부는 아들과 딸을 불러놓고 내기를 걸었다. 하룻밤 사
                    이에 아들은 성을 쌓고 딸은 나막신을 신고 한양을 다녀오는 내기였다. 그리고 내기에 지는 사람의 목

                    을 베기로 하였다.
                    노부부는 내심 아들보다는 딸이 내기에 져서 죽기를 바라면서 아들을 도와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아들
                    이 남쪽에서 성을 쌓기 시작하자 할머니는 북쪽에서 성을 쌓았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딸이 돌아오는 길
                    목을 지키면서 초조한 마음에 흙을 한 줌씩 쥐었다 놓았다. 할아버지가 쥐었다 놓은 흙이 산봉우리가
                    되어 아흔아홉 봉우리가 될 때 동쪽에 해가 떠오르고 딸이 돌아와 버렸다.
                    이때 아들은 약속한 성을 다 쌓지 못하였다. 할머니는 북쪽의 성을 다 쌓았으나 아들은 남쪽의 성을 다
                    쌓지 못하였다. 그래서 노부부는 내기에 진 아들을 죽이게 되었다. 아들의 목을 베자 천둥 번개가 치며

                    9년 가뭄 해소의 장마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할아버지와 딸도 벼락을 맞아 죽었다. 한꺼번에
                    아들과 딸과 할아버지를 잃고 혼자 남아 애통하게 살던 할머니는 죽은 후에 산신이 되었다. 용인의 진
                    산인 성주산(聖住山) 수호신이 되어 용인지역의 상산신령이 되었다.


                 자료 b-4)에서 아홉 해의 가뭄은 백제 건국 초기 9년의 어려움과 비교된다. 남쪽 성과 북쪽

                성 쌓기 내기는 비류가 세운 해빈 미추홀과 온조가 세운 하남 위례성에 비교된다. 성 쌓기 내기
                에 진 아들의 목을 벤 것은 미추홀에 도읍을 세우려다 실패하여 죽은 비류에 비교된다. 혼자 남

                아 애통하게 살다 죽어서 산신이 된 할머니는 五虎에게 시해된 백제의 시조모 소서노에 비교된
                다.
                 용인 할미산성 설화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들어낸다. 그 하나는 용인에 고구려에서 망명한 온






                7) 할미성, 용인군지(龍仁郡誌), 용인군사편찬위원회, 1990, 115쪽.
                8) 용인 할미산성 설화, 유성관, 용인할미성대동굿전수자.


                                                        오산거북놀이에 담긴 백제 건국 세력의 남하 흔적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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