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1 - 오산학 연구 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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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건대 이 河南의 땅은 북은 漢水를 두르고, 동은 高岳에 의지하였으며, 남은 沃澤을 바라보고, 서
                    로는 大海를 격하였으니 그 天險地利를 얻기 어려운 지세라 여기에 都邑을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따라온 백성을 반으로 나누어 海濱 彌鄒忽로 가서 살았다. 이에 온조는 河南
                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보좌를 삼아 국호를 十濟라 하였다.



                2) 백제 건국의 이설



                                           16)
                 『삼국사기』는 백제 건국의 이설 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c-2 시조는 비류이니 졸본인 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는

                    데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으로 돌아와서 과부로 지냈다. 그 뒤 朱
                    蒙이 남으로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워 국호를 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취하여 왕비로 삼았다.
                      처음 소서노는 주몽의 건국에 내조가 많아 총애가 특히 두터웠고 비류와 온조도 자기 친아들같이 대
                    우하였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
                    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온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여기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가재를 기울여서 도와 방업
                    을 이룩해 그 근로가 많았다. 이제 나라는 유류의 것이 되었으니 우리는 한갓 혹과 같이 답답할 뿐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떠나 남쪽의 복된 땅을 얻어 도읍을 여는 것만 같지 못하다.”
                    마침내 비류는 아우 온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浿水와 帶水를 건너 彌鄒忽에 정착했다.


                 사료 c-1), c-2)에서 백제 건국의 정설은 온조 중심이고, 이설은 소서노와 비류가 중심이다.
                     17)
                이병도 는 비류와 온조 일행이 건넌 浿水는 예성강이고 帶水는 임진강으로 해석하였다.


                4. 백제 건국 초기의 역사


                                                                18)
                 백제 건국 초기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한국인명대사전』 의 연표를 참고하였다.





                16) 백제 건국 설화, 상게서, p.10~11.
                17) 이병도,『삼국사기(하)』, 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을유문화사, 1996, p.11.
                18) 한국인명대사전, 한국인명대사전편찬실, 신구문화사, 1986.


                                                        오산거북놀이에 담긴 백제 건국 세력의 남하 흔적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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