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3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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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들은 후금의 요구에 거부할 것을 인조에게 거듭 주청했다.
그러자 후금왕 황타이지는 사신을 자주 보냈다. 이제까지의 ‘兄弟之義’을 ‘君臣之義’로 고치려
했다. 세폐도 늘려 금 100냥, 은 1,000냥, 각종 직물 1만 2,000필, 말 3,000필, 정병(正兵) 3만
명을 요구했다.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자기계를 서둘러 공급하라고 닦달하였다. 조정에서는
황타이지의 무리한 요구에 후금과 절화(絶和)하고 군비(軍備)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격해졌
다. 대신들은 후금의 부당함을 상소하며 사신을 죽이고 척화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인조도 후
금의 국서를 받지 않고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이후 조정에서는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의주를 비롯한 서도(西道)에 병기를 보내고 절화방비
(絶和防備)의 유서(諭書)를 평안감사에게 내렸다. 조선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후금의
사신들이 도망갔다. 그런데 본국으로 도망하던 후금의 사신이 인조가 내린 유서를 빼앗아 보고
조선의 굳은 결의를 알게 되었다.
5)
1636년 4월, 후금왕 황타이지는 국호를 청(淸) , 연호를 숭덕(崇德), 존호를 관온인성황제(寬
溫仁聖皇帝)로 칭했다. 이때 황타이지의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 나덕헌(羅德憲)과 이곽(李
廓)이 배신(陪臣)의 예를 거부했다. 이에 황타이지는 귀국하는 조선 사신에게 국서를 보냈는데,
조선을 '이국(爾國)' 자신을 '대청황제(大淸皇帝)’로 표기하면서 왕자를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대
군(大軍)으로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그 당시 청군의 병력은 12만 8천이었다. 淸兵 7만8천, 漢
兵 2만, 몽골병 3만이었다. 6)
청 태종의 국서를 접한 인조와 대신들은 격분하였다. 사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나
덕헌, 이곽 등을 유배시켰다. 또한 조정의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
길(崔鳴吉), 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이러한 정세를 살펴보던 청 태종은 그해 11월, 조선
의 사신에게 왕자와 척화론자들을 압송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거듭 위협했다.
1636년 12월 1일, 청 태종 황타이지는 군사 3만 4천을 심양에 집합시켰다.
12월 2일, 황타이지는 청군 2만 2천, 몽골군 1만 2천을 본대와 좌익군, 우익군으로 나누어 심
양을 출발하였다.
12월 8일, 청군의 선발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하였다. 청이 자랑하는 팔기
7)
군(八旗軍) 이었다. 정묘호란 때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명
5) 청(淸), 1636년 4월, 후금은 국호를 淸으로 바꾸었다. 본고에서는 이후 후금을 청으로 바꾸어 적는다.
6)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 7권, 경인문화사, 318쪽, 2012.
7) 팔기군(八旗軍),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가 만주족 사회를 군사적으로 재편하여 만든 조직이다. 1601년에 홍, 황, 남, 백의 旗
를 설치하고 1615년에 양홍, 양황, 양남, 양백의 旗를 더하여 8개가 되었다. 旗人에는 몽골족과 한족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광교산전투, 김준룡장군 전승지 답사기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