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2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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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간차 공격에 조선 관군의 손발이 묶였다. 산성을 나와 청의 기마병을 추격하자면 곧바로

               이어지는 청의 기마병에 앞뒤로 포위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청의 발 빠른 침공에 인조와 대신들은 당황하였다. 한반도 최고의 요새인 강화로 피난도 못하
               였다. 황타이지는 제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왔는데, 인조는 제 목숨을 구하고자 남한산성으로

               도피하였다. 최고통치자의 이런 모습에서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판나고 있었다.
                병자호란, 광교산 전투의 결과는 청실록(淸實錄)에 자세하다. 조선왕조 인조실록(仁祖實錄)은

               광교산 전투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승전국 청의 시선이 두려워 승리의 기록은 빼고 후퇴의
               아쉬움만 기록하였다. 총포와 화약, 군량과 병력이 바닥이 나서 전투를 할 수 없는 상황은 고려
               하지 않았다. 이 또한 광교산 전투를 지원하지 못한 조선 정부의 무능을 핑계한 가림막이었다.
                                                                                        3)
                그런데 승전국 청의 기록은 다르다. 광교산 전투에서 전사한 백전노장 양고리(揚古利) 의 이
               름을 특별히 기록하였다. 그래서 광교산 전투의 과정을 거꾸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본 원고는 병자호란, 광교산 전투의 현장을 답사한 기록문이다. 청실록과 김준룡신도비, 광교

               산 전투가 남긴 지명과 자료에 근거하였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논문이 아니라 근거
                                                                              4)
               에 상상을 더한 소설에 가깝다. 국난극복에 앞장선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 의 전략과 전라근
               왕병의 활약을 조명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Ⅱ. 병자호란은 조선정부의 내우외란이었다





               1. 병자호란의 발생



                1636년 1월, 후금은 형제지국 조선에 더욱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더 많은 액수의 세폐(歲
               弊)와 군자기계(軍資器械)를 내라고 요구했다. 만주와 몽골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세력이 커진

               때였다. 명의 영토인 베이징(北京)을 공략하면서 전략물자가 부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3) 양고리(揚古利), 청태조 누루하치의 사위다. 만주 정황기(正黃旗) 사람으로, 청 제국의 건국 영웅이다.
               4) 김준룡(金俊龍), 전라도 병마절도사, 병자호란 때 군사를 이끌고 광교산에 이르러 격전을 벌였다. 청 태조 누르하치의 사위이
                자 청의 백전노장 양고리 등 청대장 3명을 사살했다.



               60  임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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