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61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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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군사 수만을 세 영으로 나누어 오산 등지에 헤쳐 늘어놓고 왕래하면서 싸움을 걸었다.”
이 기록의 세 곳 중 한 곳은 운암들일 것이다.
임진왜란의 기록은 이 외에도 신경(申炅 :1613∼1653년)이 지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서도 보인다.
“수만의 군사를 세 진으로 나누어 오산역 등지에 진을 치고 왕래하며 도전하였다.”
라는 기록인데, 여기의 오산역도 역말이거나, 운암들지역일 것이다.
또, 현종 7년(1666년)에도 운암들로 볼 수 있는 기사 내용이 있다. 6)
“상이 청호(靑湖) 앞의 들녘에 도착하니 수원(水原)의 군병이 결진(結陣)하고서 대기하였다. 상이 군중
(軍中)에 들어가 구인기에게 이르기를,”
청호역 앞의 들녘이니 운암들일 것이다.
다음의 내용에도 운암은 청호역 부근이라 하고 있다. 7)
“수원의 영화역을 거쳐 오산 청호역을 지나 남쪽으로 가는 까닭에 오산은 지리적 요충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오산 청호역의 오산주막은 당시 수원군의 남부면 구천동 새술막, 안녕면 간촌 대황교 주막, 태
촌면 병점 병점주막과 더불어 가장 큰 주막이었다. 조선후기 이래 “수원주막에 난 소문 전국에서 다 안
다.”는 속담의 당당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는 인근의 청호면 갈곶리 갈곶보(葛串洑)와 청호면 역촌 청
호역 부근의 운암보(雲岩洑)가 있었던 만큼 농사짓기에도 알맞은 풍요로운 땅이었다.“
위의 내용들에 의해서도 운암들의 위치는 비정할 순 있으나 정확한 영역은 알기 어렵다. 그러
나 농사짓는 땅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현재까지도 농사짓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영역 비정은
6) 현종실록 12권, 현종 7년 3월 28일 무신
7) 오산시사편찬위원회, 2020, 『오산시사 2권』, 191쪽
운암들(운암뜰) 탐구 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