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60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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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옛날에 오산천에 제방이 없어 장마만 지면 물이 범람하여 농사에 막대한 피해가 있었지만,
제방을 쌓을 수 있는 능력이 없어 고민하였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길을 지나던 과객이 금암리 어느 진
사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과객은 구척장신에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범상치 않아 보
였으며, 이렇게 며칠을 무위도식하며 지내다 하루는 진사에게 신세를 많이 졌으니 도와줄 일이 없냐고
물었는데, 진사가 오산천 범람에 대해 말하게 되고, 이 과객은 순식간에 오산천의 제방을 쌓고는 떠났는
데, 이 사람의 이름이 운암(雲岩)이었고, 고마운 마음을 표하기 위해 오산천변의 들을 운암들이라 부르
게 되었다.”
이 전설에서는 오산천변의 들을 운암들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 15년(1433년) 기사이다. 4)
“대가가 수원부 오산원(烏山院) 들에 이르니, 부사 조극관(趙克寬)이 와서 뵈었다.”
이곳의 오산원이 어디인지 확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청호역이 있는 곳 근처에 있지 않았을까
도 생각되어진다.
조선시대 선조 때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이었던 조경남(趙慶男:1570∼1641년)이 지은 『난중
잡록(亂中雜錄: 1618년 간행)』 선조 25년(1592년) 10월 18일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적은 오산(烏山) 등 세 군데에 진영을 만들고 … 흉한 적이 수원 땅에 가득하여 청회(靑回)오산의 들판
에 적진이 나열되었고…”
5)
여기서 말하는 청회는 오늘날의 대원동 일대의 청호역(菁好驛 혹은 靑浩驛) 을 말하는 것이
며, 오산은 청회와 이웃하니 지금의 오산동 일대의 운암(雲岩)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난중잡록』에는 다음과 같이 운암들을 가리키는 내용이 또 보이는데, 선조 32년(1599년) 7월
의 기사 내용이다.
4) 세종실록 권60, 세종 15년 4월 22일 을사
5) 현재의 역말.
258 강경구·남경식·한민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