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0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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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오산장의 거래 품목과 장세





               1. 오산의 농·어·축 생산물



                오산은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의 수도인 남부 즉 기전(畿甸)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주요

               지역이다. 오산의 생산물이 오산장에서 주로 판매되었을 것이다.
                오산은 제1의 농산지를 이루고 있었다. 조선후기인 1896년에 지금의 오산이 수원군 청호면으
               로 편제되었는데 그 전인 정조 20년(1796년) 청호면에 양향둔(糧餉屯)이라는 둔전을 설치한 것

               으로 봐선 삼남지역을 오고가는 교통의 요지로서 농사짓기와 수조하기에 편리했기 때문인 것으
               로 추정된다.
                한편 그 시절 오산을 비롯한 수원 인근 지방의 주요 물산으로는 소금, 황조기, 농어, 진어, 뱅

               어, 황합, 굴, 낙지 등 수산물만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서해 지역이 인접해 교류가 많았던 것으
               로 생각된다. 또한 내륙지방의 농산물과 해안지역의 어물 교류를 위한 시장으로 장이 열렸는데,
                                      1)
               오산장은 역사가 매우 길다.
                당시 오산을 포함한 수원지역의 한우는 우량역축으로 소문이 나고 고기 맛이 좋아 일본과 러
               시아로 수출하는 물량이 13,000마리 정도가 되었다고 하며, 당시에 농가 5~10호마다 한우 1마

               리를 사육할 정도로 축산 열기가 왕성할 때도 있었다.               2)
                                                                 3)
                오산의 양잠도 크게 활성화되었는데, 특히 오산의 독고리  지역이 대단히 번성하였다. 지금
               까지도 뽕나무를 많이 재배했던 상골밭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며 오산동에도 상골밭이라는 지

               명이 있었는데, 이곳 역시 오산천변 일대에 뽕나무 밭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1960년
               대까지만 해도 지금의 오산종합운동장 위쪽과 청학동 주변, 초평들의 천변과 남촌동, 대원동 일

               대에 많은 뽕나무들이 잔존해 있었다. 그러나 양잠이 활성화되지는 못했고, 가내 주부들의 부업
               형태에 머물렀다. 소비처는 오산장이거나 개인이 사용했을 것이다.
                오산의 미곡 생산물에 대하여 알아보자. 1922년 당시 오산이 속해 있던 수원군의 전체 농가

               는 2만 2,581호, 농가 인구는 12만 3,031명으로 농가는 총 호수의 85.5%였는데 전업농은 83%





               1) 오산시사편찬위원회, 『오산시사2권』, 2009. 477쪽.
               2) 위 책. 479쪽.
               3) 현재 오산시 수청동의 한 마을.



               248  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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