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6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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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논자를 비롯 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늘 입버릇처럼 얘기한 것이 재인청의 존재이다.
이동안은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재인청 출신의 이재학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4살에 아
버지가 기피한 도대방의 직에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재인청 존재만 이
야기 할뿐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는 이야기한바가 없다. 다만 화령전 풍화당 뒤쪽의 화장실 앞
공터가 옛 재인청의 자리였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화성행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발굴할
때 재인청 건물의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화령전 복원과 정비 사업으로 제기고와 어정만 복원
되었으며 그곳은 아직도 빈 공간으로 남아있다.
오산 재인청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오산에 있던 재인청이 바로 수원의 재인청이란
주장은 수원의 향토사학자 이제재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화령전이 재인청이란 이동안의 주
장에 대해 “화령전은 왕의 진영을 모신 사당이기 때문에 결코 재인청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
다. 그리고 1930년대 수원군 성호면 부산리 곧 지금의 오산시 부산동에 살던 이종하가 경기도
재인청선생안(京畿道才人廳先生案) 외의 재인청관련 문서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곳이 재인
청이라고 했다. 또 그는 이종하가 살던 집이 말하자면 재인청이었기 때문에 수원재인청이란
특별한 건물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화령전의 역사적 성격이나 문헌상으로 보아 재인청은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
았을 것이며 현재의 오산 부산동에 있었던 것은 무가들의 사적조직으로 본다”라고 주장하였
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수원재인청은 이종하가 살던 현재의 오산시 부산동에 있었으며 수원
재인청은 어떤 구체적인 건물의 형태로 있었다기보다 그냥 무가들의 사적 조직으로 보는 정도
였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확인 할 사항은 이종하 집안에서 갖고 있던 문서들 중 경기도창재도청
안(京畿道唱才都廳案(道光16年(1836년)), 경기도재인청선생안(京畿道才人廳先生案(咸豊元年
1851년)), 경기도창재청선생안(京畿道唱才廳先生案(光武5年1901년))등의 문서는 경기도재인
청과 관련된 문서들이지 결코 수원재인청과의 관련된 문서가 아니다. 과거 화성에서 분리된
오산이 화성, 수원과 한울타리 안에 있었듯 오산의 재인청이 결국 수원의 재인청인 것이다.
화성재인청 복원 논문 중 고성주가 증언한 문서에 관한 이야기는 화령전에서 출발하여 국악
협회의 모체가 된 수원정악원의 각종문서와 악기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논자가 화령전에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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