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7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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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할 때에도 풍화당 우측 방에 각종문서들이 산재해 있었으며 장구, 양금, 거문고 등의 악기가

                있었다. 악기 뒷면에는 하나같이 수원정악원이라 은니로 써져있었다. 이 악기는 정경파 사후
                개인이 보관하고 있다. 또한 많은 문서와 사진기록 등은 화성박물관에 기증보관 되고 있는 실
                정이다.

                  화령전과 재인청의 관련된 증언에 이동안선생은 6.25동란으로 피난을 갔다 오니 외삼문이
                내려앉고 거지가 득실거려 다 내려앉고 무너진 건물을 부서진 장안문의 자재로 고쳐 썼으며

                당시 수원의 유지들과 함께 수원정악원을 설립하여 초대 원장을 지냈다”라고 하였다. 천용식
                은 6.25동란이후 연습할 공간이 없어 화성역 옆 주막에 연락소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들락
                거렸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하였다.



                  또한 이동안가계의 팔도도대방직의 세습에도 모순된 사항이 존재 한다. 1906년에 태어난 이
                동안은 1922년부터 10여 년 간 광무대극장에 있었으며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등의

                당시 광대로 불린 각지의 재인청 출신으로 활동하던 광대들을 보면서 재인청 출신임을 강조하
                였고 나아가 본인의 윗대어른과 선배들이 있었던 재인청을 복원하려 애썼다. 이러한 이동안이
                14세에 도대방직을 물려  받았다고 하는 등 사실에 맞지 않은 말들을 많이 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이동안의 가족들은 재인청 소속에 그쳤고 이용우의 부친 대에서 이미 재인청 도대방의
                지위가 막을 내렸으므로 그의 말은 맞지 않는다.



                  지명을 보자면 과거의 지명과 현재의 지명이 많은 변동을 거친다. 예를 들어 과거 양주군 이
                였던 곳이 동두천, 의정부 노원구, 광진구, 구리시, 남양주 등으로, 심지어 중심이 분리 된 곳

                도 있다. 광주시는 향교가 없다. 이웃하는 하남에 향교가 있다. 이처럼 과거에 한 덩어리에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른 오산도 마찬가지다. 화성재인청이니 수원재인청란 말은 경기도재인청

                에서 파생된 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오산의 중심에 재인청이 존재하는 건 누구도 거스
                를 수 없는 진실일 것이다.



                2. 재인청의 형성


                  재인청의 계원은 세습무(世襲巫)인 ‘단골’반주와 굿과 굿 사이의 재능을 보여주는  ‘화랭이’들

                을 주축으로 ‘어름사니’소리와 춤을 전문으로 하는 ‘예인’그 역할이 분명치 않으나 장단잽이로
                보이는 ‘재인’,광대 등을 망라 하는 이름이 분명하다.



                                                               경기도재인청과 마지막 화랭이 이용우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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