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5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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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현재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예능인이 맞고 있는 특정한 기능들은 뚜렷이 존재해 왔다. 이러

                한 계층을 조선조에서는 많은 이칭으로 부르고 있었으며 특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단합된 조직
                을 독자적으로 운영하여 왔다. 이러한 집단을 부르는 이칭은 광대, 창우, 화랑(화랭이), 산이

                등이 있으며 이들 집단을 가리켜 재인청(才人廳), 광대청(廣大廳), 화랑청(花郞廳), 창재청(唱
                才廳), 심방, 풍류방 등 지역에 따라 다르게 부르고 있음이 적송지성(赤松智城)과 추엽륭(秋葉
                隆)의 논고에서 확인된다.

                  그중 재인청에 대한 존재가 확실히 나타나는 데 각종문서와 기록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정
                리되어 있는 자료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경기도창재도청안(京畿道唱才都廳案)과 경기도재인
                청선생안(京畿道才人廳先生案)2책 등이라 하겠다. 이 책을 통해 경기도재인청의 구체적 실상

                을 파악하고 재인청이 낳은 마지막 화랭이 이용우의 가계를 이해하는 것이 논란의 중심에 있
                는 재인청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리라 판단된다.
                   또한 재인청의 존재와 오산과의 관련을 바로 이해하고 이용우와의 재인청의 관계를 짚어보

                며 올바른 통찰을 통하여 각종자료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Ⅱ. 재인청과 이용우






                1. 재인청


                  재인청과 화성(오산, 화성, 수원)과의 인연은 화령전이 건립된 순조 즉위 원년(1801년)이후

                의 재인청에서 비롯되었다. 그 이유는 재인청의 논란 속에 화령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화령전은 순조 즉위 원년에 행궁 남쪽 길지에 지어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를 올렸으며
                후대 왕조가 다하는 날까지 봉심은 계속되었다. 그런 화령전이 논란에 중심에 선 것은 재인청

                의 존재가 화령전 안에 존재한다는 주장 때문이다. 논자의 스승이시기도한 이동안선생은 조선
                마지막광대 재인청 도대방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말년에 화령전 풍화당에서 이동안선



                                                               경기도재인청과 마지막 화랭이 이용우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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