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5 - 오산문화 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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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VOL. 62 osan culture
OSAN CULTURE NEWS
오산의 글씨는 조상기 서예가로 통한다. 다. 그것이 청학서우회의 시작이다. 학생과 교직
원, 동네사람들이 40년 동안 글씨로 인연을 맺
오산의 글씨는 조상기 서예가로 통한다. 모든 고 있으면서 청학서우회 안에서 경기도 초대작
서체가 통달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을 만큼 조 가인 조상기 서예가에게 지도를 받고 있는 것이
상기 서체로 명명되고 있다. 다.
지난 '현봉 조상기 서예전'이 문화공장오산 오 조상기 서예가가 붓글씨를 쓸 때 한글은 안 쓰
산미술관에서 열렸을 때 전시장 곳곳 작품 속 고 한문만 쓰는 것은 한글을 깊이 공부한 적이
에 들어있던 조상기 서체. 그 조상기 서체가 만 없어서라고 하는데 한문 서예만 공부하는 것도
들어 낸 고고한 풍미를 오산시 전역에 퍼지게 끝이 없다고 했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서예를 통한 부모님은 늦은 나이에 조상기 선생님을 두셨
예술의 극대화를 보여줬다. 다. 늦게 둔 아들을 위해 독선생을 두고 한문을
조상기 서예가는 서예로 점철된 서예적인 삶을 가르쳤고 6,25직후인 6살에 한문 천자문을 배
살고 있다. 각 글씨체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우도록 했는데 1년 뒤에 집에 직접 서당을 차려
이끌려 전시장을 돌다보면 옛 글씨 하나하나에 배우게 했다. 동네 청년들이 서탄면 내천리에
미학적 아름다움이 작품 속에서 들어있다. 관 있는 집에 한문을 공부하러 모였을 정도로 서
람객들은 서체의 예술성과 우리 붓글씨의 미학 당이 인기가 있었다.
을 품을 수 있어 전시장을 메웠다. 글자의 획의 그 후 초등4학년 때 정주상 저자가 쓴 쓰기교
아름다움 가치가 빛나도록 서체가 뒷받침해주 본을 배우는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후 61년
는 조상기 서체에 매료된 사람들이다.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임시휴교령이 내렸
조상기 서예가는 1977년에 오산 중·고 체육교 을 때 3일 동안 학교에 가지 않는 동안 서울 사
사로 부임해서 유도부를 만들었다. 강당에 유도 는 작은 아버지와 경복궁 구경을 갔었는데 그
장을 만들어 놓고 그 옆 서예실에서 서예를 가르 곳에서 국전이 열리고 있었다. 국전 작품을 감
쳤다. 체육교사가 운동시키기도 힘든데 서예실 상하면서 작품마다 '표고'한 것을 보고 엄청난
을 만들어 서예를 하도록 한 것은 붓글씨에 각별 충격을 받았다.
한 애정이 있어서였다. 그 후 유도부는 10년 있 글씨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
다 없어졌지만, 서예반은 계속해서 활성화되었 고 깊이 공부할 기회가 있으면 공부를 하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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