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2 - 오산시 지명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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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벌음동에는 상정재, 가꿀우물 등의 땅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 서랑의전설
벌음동에는 약 360여 년 전부터 이천 서(徐)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고 있다. 서씨
문중에서는 전설같이 전해오는 애달픈 이야기가 있다. 때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
어난 때의 일이다. 여진족인 후금의 군대가 조선을 침범하여 우리의 군사는 중과부
적으로 남쪽으로 밀렸고, 마침내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몽진까지 하게 이르렀
고, 후금군에게 60여 일을 항거했지만 결국 임금은 후금의 장수 용골대에게 신하의
예로서 절하고 항복해야만 했던 치욕을 당하던 때이다. 벌음동 마을로 여진족들이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고, 부녀자에게 행패를 부리며 살생을 저질렀다. 이때에 벌음
동에서 살던 서희장군의 후손인 서대감이 부원수로 여진족과 싸우다 전사를 하게
되었다. 이 서봉학공의 슬하에는 두 아들과 10대 후반의 아리따운 서랑이란 처녀가
있었다. 두 아들도 여진족과 싸우기 위하여 출전했고 집안에는 부인과 딸인 서랑만
이 있었기 때문에 두 모녀가 서장군의 시신을 묻어야 했다. 서랑은 인근에 인물 좋
고 예절 바른 낭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랑캐들은 또 마을을 뒤지
며 부녀자들을 찾아 헤매다 서대감의 집 앞에서 서낭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름다
운 미모의 서낭자를 발견한 그들은 서랑에게 접근하려 했으나 도무지 틈을 보이지
않자 강제로 서랑의 몸을 끌어안고는 젖가슴을 주물렀다. 그러나 서랑의 완강한 반
항과 서대감 집안의 위용에 눌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들은 물러갔다. 그 후 서랑
은 집안에 들어와 여진족 군에게 능욕당함을 분하게 여겨 오랑캐의 손이 닿은 젖가
슴을 물로 씻고 또 씻었으나 영원히 그 더러움을 지울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품에서 은장도를 꺼내어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하였다. 나라의 위기에 내몰린 여
인의 정절 의지가 얼마나 부질없게 되며, 국민의 안위를 책임지지 못하는 나라는
또 얼마나 수치스러운 무능한 존재인가. 처녀의 몸으로 충절을 지킨 서랑의 시신을
접한 서씨 문중에서는 그녀의 높은 뜻을 기려 마을의 서북쪽 장천골 선영에 묘를
썼다. 그러나 서랑에게 열녀문이 내려졌다는 기록이나 전설은 없다. 그것은 서봉학
장군이 패장이었고, 또한 전란 중이라 이 땅의 수많은 여인들이 여진족에게 짓밟혔
으며, 수많은 서랑 같은 처지의 여인이 있었기에 흔한 이야기로만 여겼는지도 모른
다. 그러나 지금도 서랑의 묘는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며 마
을을 바라보는 양지바른 곳에 있다. 서랑의 높은 충절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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