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9 - 오산시 지명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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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 강태공들이 많이 찾았다.
* 능지기와 정조임금의 전설
조선 정조 때에 화산릉(현 융릉)지기가 살았는데 하루는 독산성 안의 보적사에 계
시는 스님이 지나가다가 능지기를 보고 “당신은 내일 죽을상이요.” 하니 능지기가
하도 기가 막혀 스님을 붙잡고 늘어지며 “내가 죽을 줄을 아니 분명 살아날 방도도
알 것이니 제발 알려주시오.”라고 사정하니 한참을 망설이던 스님이 “그러면 내일
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능 앞에 엎드려만 있어야 하네.”라고 이르고는 유유히
걸어갔다. 다음 날 능지기는 새벽에 일어나 하루종일 능 앞에 엎드려 있었다. 효심
이 지극한 정조임금은 생부의 묘인 화산을 자주 찾았는데, 그날도 화산에 나섰다가
비를 만나게 되어 수원행궁에서 유하게 되었으나 비가 많이 오니 아버지의 능이
훼손될까 걱정되었다. 임금은 신하를 불러 “당장 능에 가 보아라, 만약 능지기가 집
에 있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와야 하느니라.” 추상같은 임금의 명을 받은 신
하는 능지기의 집에 들러 보니 능지기가 보이지 않는지라 능으로 가 보게 되었다.
능지기는 비가 수 같이 쏟아지는데도 능 앞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신하는 돌아
와 임금에게 그 정황을 상세히 아뢰니 정조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후한 상을 내렸
다고 전한다.
(5) 지곶동(紙串洞)
지곶동은 역사가 오래된 마을이다. 지곶동의 지명유래와 관련하여서는 종이와 밀접
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의 뒷산인 목성산에는 닥나무가 많았으며
이것을 이용하여 종이를 만들던 곳이기에 종이를 의미하는 ‘지(紙)’자를 사용하게
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한편 종이와는 무관하게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감나무가
많았으며 가을이면 곶감을 꿰었음으로 지명에 ‘곶’을 사용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이 ‘조이고지, 종이고지, 조꼬지’ 등으로 불렸던 사실로 미루어 지곶
동은 종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지곶리는 종이를 뜨는 조지소(造紙所)가 이곳에 위치했다. 지곶동은 1789년(정조
13년)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마을 뒤의 독산성과 더불어 역사가 오랜 마을이다.
■ 독성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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