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0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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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닿을 수 있으니 천주의 봉수군이 50리 길을 와서 알려주는 것을 앉아서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과는 그 완급이 천지현격일 뿐만이 아니겠기에 감히 이렇게 진달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말은 참으로 옳다. 수원은 경기의 중지인데 봉수로 경보를 알리는 일은 이
토록 허술하니 매우 염려스러운 일이다. 독성에 봉수를 더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후략)…
『備邊司謄錄』英宗 9)
영조4년(1728) 4월 27일
이 달 26일, 총융사 장붕익이 인견하여 입시하였을 때 아뢰기를 …(중략)… 본부의 남쪽 십리
쯤에 독산산성이 있습니다. 만약 이 산에 간봉을 설치하여, 죽산 좌찬과 봉수를 서로 응하게 하
면, 진실로 변보가 있더라도 수원에서도 즉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독산성 봉수에 대한 『朝鮮王朝實錄』과 『承政院日記』, 『備邊司謄錄』의 기록을 보면 독산성 봉수
10)
의 설치 시기와 필요성, 봉수로 를 알 수 있다.
독산성 봉수는 1690년(숙종 16년)에 처음으로 설치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호조 참판 이
의징이 현재 봉수로의 문제점을 얘기하면서 독산성에 추가로 봉수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고 이
의징의 건의에 대하여 숙종은 독산성에 봉수를 설치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당시에 봉수는 실제
로 축조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지는데, 숙종대 이후인 1728년(영조4년)과 1754년(영조30년)에도
독산성에 봉수를 추가로 설치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다만, 1754년 이후
독산성 봉수에 대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당시에도 봉수가 실제로 건립되었는지 확인하기 어
려운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도록 하겠다.
한편 독산성 봉수는 기존에 대응되던 봉수들의 신호를 좀 더 빠르게 전달하기 위하여 설치되었
는데 『承政院日記』와 『備邊司謄錄』영조대의 기록을 보면 독산성 봉수를 간봉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독산성 봉수와 대응하는 봉수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서로 다른 노선임을 알 수
9) 『備邊司謄錄』英宗
영조4년 4월 27일
今四月二十六日摠戎使張鵬翼引見入侍時張鵬翼所啓 …(중략)… 本府南距十里許有禿山, 山城若於此山設置, 間峯與竹山佐贊,
烽燧相應, 則苟有邊報, 水原亦可卽知矣…(후략)…
10) 봉수로는 각 도에서 시작하여 서울의 목멱산 봉수로 이어지는 노선으로 총 5개 노선이 있다. 1거로는 동북노선으로 함북 경
흥-서울, 2거로는 동남노선으로 경남 동래-서울, 3거로는 서북내륙노선으로 평북 강계-서울, 4거로는 서북해안노선으로 평
북 의주-서울, 5거로는 서남노선으로 전남 순천-서울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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