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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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역을  거쳐  오산에  행차하여  임시  주정소(晝停所)를  설치하여  머물렀다.  세종대에

                  도  왕실의  군사  의례인  강무를  오산지역에서  거행하여  국왕의  행행이  의례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1435년(세종17)  세종은  왕세자와  종친,  부마,  관료  등  왕족과  관원
                  등을  대동하고  강무를  위해  행행하였다.  강무는  왕실의  사냥  문화가  의례화된  일종
                  의  군사  훈련으로  관원은  물론  군사와  지역민이  수만  명씩  동원되는  대규모  국가
                  행사였다.  조선  전기에  오산지역에  국왕의  강무가  시행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에  인

                  구가  밀집되었고  물산이  풍부하여  국왕을  비롯한  중앙의  관료들은  물론  군사에  이
                  르기까지  의식주의  지원이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국왕의  강무가  진행되던  지
                  역은  사냥에  적합한  넓은  평야와  낮은  산들이  있으면서  하천이  흐르는  곳이므로  물
                  산이  풍부한  것은  당연하였다.  이에  부합하듯이  오산지역에서는  꿩을  비롯한  많은
                  사냥감을  왕실에  진상하기도  하였다.
                    오산지역이  행정구역의  면모를  갖추는  것은  다음  기록에  의해서도  확인된다.『조

                  선태종실록』에  의하면  태종  16년(1416년)  계미(癸未)에  왕이  ‘수원부  오산(烏山)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종  15년(1433년)  을사(乙巳)에는  ‘대가가  수원부  오
                  산원(烏山院)들에  이르니  부사  조극관(趙克寬)이  와서  뵈었다.’라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부터는  오산지역이  어느  정도  행정구역의  면모를  갖춘  것으

                  로  보인다.
                    조선시대  선조  때의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이었던  조경남(趙慶男:1570〜1641년)
                  이  지은  『난중잡록(亂中雜錄:  1618년  간행)』에  의하면  선조  25년(1592년)  10월
                  18일  ‘적은  오산(烏山)  등  세  군데에  진영을  만들고  …  흉한  적이  수원  땅에  가득
                  하여  청회(靑回)오산의  들판에  적진이  나열  되었고…’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청회는  오늘날의  대원동  일대의  청호역(菁好驛  혹은  靑浩驛)을  말하는  것이

                  며  오산은  청회와  이웃하니  지금의  오산동  일대의  운암(雲岩)들판을  말함이라고  보
                  인다.  이런  기록은  『난중잡록』에서  또  보이는데  선조  32년(1599년)  7월에  ‘그  군
                  사  수만을  세  영으로  나누어  오산  등지에  헤쳐  늘어놓고  왕래하면서  싸움을  걸었
                  다.’라는  기록이  또  나오는  등  이와  같은  문헌상의  기록으로  보아  오산은  예전부터

                  한반도의  중심  지역으로서  군사적  요충지임은  물론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
                  전쟁터로  수많은  고난과  주민의  애환이  서린  곳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에는  6∙25
                  한국전쟁  당시  오산의  죽미령  고개에서  유엔군이  최초로  인민군과  격전을  벌였다는
                  사실은  이런  전략적  요충지와  무관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의  기록은
                  이  외에도  신경(申炅  :1613〜1653년)이  지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서도  보
                  이는데  ‘수만의  군사를  세  진으로  나누어  오산역  등지에  진을  치고  왕래하며  도전

                  하였다.’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오산의  기원이자  연원(淵源)으로  보이는  수원의  오산지역은  상고시대부
                  터  조선  중기까지  수없는  부침과  변화를  거듭하다가  안정적이며  확고한  행정구역으
                  로  정착한  것은  조선시대의  문예중흥기라는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고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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