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P. 11
신석기문화는 가장동유적의 집터와 구덩이 등과 그곳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를 통
해서 매우 단편적인 내용을 알 수 있는 상황이다. 이 가운데 점렬상의 타래문이 시
문된 평저 빗살무늬토기는 서울 암사동 신석기유적의 이른시기와 유물과 관련되는
것으로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전기에 속하는 것이다. 자료는 적지만 오산 가장동
유적은 암사동유적과 더불어 중서부지역 최초의 신석기인들이 남긴 물질자료로서
그 가치는 매우 높다(기원전 4000~3600년 또는 4500~4000년 편년).
청동기시대의 유물로서는 외삼미동, 가장동, 지곶동, 수청동의 고인돌, 금암동에
고인돌군 등 오산 여러 곳에 고인돌 존재를 통해서 오산에 청동기시대도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최근 오산 시내의 급격한 개발에 따른 발굴조사를 통해 보면
세교지구에서 발굴된 오산 내삼미동, 궐동, 청학동, 탑동 일원은 원래 청동기시대
마을이 있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산내삼미동유적에서는, 오산탑동·두곡동유
적, 오산청학동유적 등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시대의 생활 유적이 발굴되어 오산은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것이 유물로 확인된 것이다. 또, 청학동유적과 가장
동유적에서는 의례공간으로 추정되는 환구시설이 있다. 환구의 연대는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결과 기원전 510~380년으로 측정되었다.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로는 가장동유적에서 주거지 1기, 구상유구 2기 및 수혈 9기
가 각각 조사되었다. 이들 세 종류의 유구들에서 두형토기 및 우각형파수가 공통적
으로 출토되어, 이 지역에도 초기 철기시대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
다.
최근 다수의 분묘들이 수청동에서 발굴되었는데 적어도 원삼국시대 후기에는 이
일대에 중요한 거점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오산지역은 다른 경기도 남부지역이나 충청도, 전라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낙
랑이 설치된 기원전 108년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의 유적이 아직 제대로 발굴되고
있지 않고 있으며, 앞의 수청동 유적의 분묘는 모두 3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2세기 중반 이후의 원삼국시대 문화 양상은 궐동 유적의 유구와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유물운 원저단경호, 유개대부호, 원저심발형토기, 심발형토기 등의 토기류
들과 검, 철모, 철부, 철검, 철촉, 철착 등의 철기류가 주종을 이룬다. 기타 유물로
는 21호묘의 구슬 100점이 유일하여 전반적으로 유물이 풍부하게 부장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삼국~남북국시대의 오산은 백제, 고구려, 신라의 순서로 지역 지배의 국가가 바뀐
다. 백제의 경우는 선행하던 청동기시대 이후 재지 사회가 성장하면서 이곳에 형성
된 지역 정치체가 서울 강남에서 힘을 뻗쳐오는 백제국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그 시점은 4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군대가 백제
왕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왕실이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면서 오산지역도 고구려의 지
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553년 신라가 한강유역 전체를 장악하면서 오산지역은
다시 신라의 지배 아래에 들어간다. 이후 통일전쟁을 거쳐 남북국시대로 이행한 이
후의 오산지역은 지속적으로 신라의 영토였다. 백제, 고구려, 신라를 구분하여 알아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