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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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
<백제> 현재의 행정구역 명칭으로 내삼미동, 외삼미동, 수청동, 금암동, 세교동에
걸친 광역 조사를 통해 청동기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적이 확인
되었다. 이 유적 들은 3~5세기에 걸쳐 형성되었는데 이 시점이 바로 오산지역의
독자적인 정치체가 백제의 지방으로 흡수되는 단계이다. 내삼미동-외삼미동 취락
주거지인 기전문화재연구원 발굴 14호 주거지를 보면, 유일하게 백제 중앙과 유사
한 구조를 갖고있으며, 이 주거지에 거주한 인물이 오산지역을 지배하려는 백제 중
앙의 정책을 집행하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세교분묘군은 북에서부터 금암동, 수
청동, 궐동, 누읍동 등지에 걸쳐 넓게 분포하고 있다. 발굴조사된 분묘의 수는 총
378기에 이르는데, 실제로는 400기를 넘어서서 경기 남부 최대 규모이다. 유적의
연대 3~5세기대에 해당되는데, 이 시점은 오산지역의 독자적인 정치체가 한성 중
앙과 정치적 상하 관계를 맺고 마침내 지방으로 편제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백제는
마한 정치체들을 통합하고 때로는 군사적인 정복도 감행하였지만 주로 한성중앙에
서 위세품이나 외부에서 수입한 기성품을 나누어주며 회유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고구려> 장수왕의 군대에 의해 백제가 일시 멸망하고 왕실이 남천하면서 한강
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간다. 매홀군(買忽郡)이란 명칭으
로 수원, 화성 일대가 편제되었는데 오산지역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산에서 고
구려가 중부지역을 장악하던 기간인 78년 동안, 즉 475년부터 553년 사이에 해당
되는 고구려 유적이 발견된 것이 없다. 다만 인접한 화성 청계리에서 고구려 석실
묘가 발견된 적이 있어서 참고할 수 있다.
<신라> 551년 백제가 잠시 한강 하류지역을 고구려로부터 되찾았으나 곧 신라에
빼앗기게 된다. 신라는 553년 한강 하류지역을 신주로 편제하였고, 오산도 여기에
편제되었다. 557년 신주를 폐지하고 북한산주로, 568년에는 남천주로 바뀌면서 신
라의 영역지배는 계속되었다. 통일전쟁이 종료된 후 중부지역에 한산주가 설치되면
서 오산도 한산주에 편입되었다. 신라가 오산지역을 강화하고 지배하는 과정은 중
요한 거점지역에 산성을 쌓아서 고구려와 백제에 군사적으로 대비하는 것이었다.
오산에서 이러한 역할을 한 관방시설은 독산성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석축성벽과 축
대는 조선 후기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나, 발굴조사 결과 처음 축조된 시점은 신
라로 소급되었다. 이로써 그동안 신라 유물이 성 내부에서 자주 채집되던 사정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어느 구간이 신라 당시에 축조한
것인지, 아니면 현재 성벽의 안에 신라 성벽이 있는지의 여부는 앞으로 밝혀질 것
이다.
독산성과 관련된 신라 유적으로는 독산성 북편에서 발견된 양산동 유적을 들 수
있다. 이 유적은 황구지천에 인접해 있는데 조사구역이 좁아서 유적의 정확한 성격
은 알 수 없었으나, 일반적인 취락은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 등고선을 따라 2줄의
석열(축대)이 있고 수혈 유구 1기가 발견되었을 뿐이지만 유구의 기수에 비해 토기
의 출토량이 많고, 그것도 조리, 저장 용기보다 고배와 대각 등 소형 기종이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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