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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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禿山城主)가 남녀 3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여 왔으므로 왕은 이들을 받아들
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기록들은 오산의 독산성이
용인과 더불어 호각지세를 이루며 격전장의 위치였음을 알 수 있는 반면, 독산성이
작은 성이지만 성 주변에는 3백 명 그 이상의 주민이 생활했음을 알 수도 있다.
이러한 옛 문헌의 기록으로 보아 오산의 역사나 주민이 살았다는 증거는 약 2천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청동기시대인 삼한시대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오산지
역은 삼한시대와 삼국시대에 걸쳐 격전지로 되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통치의 획일화와 능률적인 행정체제 개편에 따라 실시된 행
정구역 개편에 따라 백제, 고구려의 옛 땅들을 포함한 전국의 행정구역을 9주(州)로
통합하면서 매홀군은 한주(漢州)에 속하게 되었으며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기에
이른다.
또, 이때에 현재 오산시에 속한 진위 일부(갈곶동, 청호동, 고현동)는 부산현(釜山
縣)에서 진위현(振威縣)으로 함께 개칭된 것으로 미루어 오산 연혁의 기원은 삼한과
삼국시대 이전부터라고 단정 지을 수 있겠다.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고려의 태조가 후백제를 치기 위해 수성으로 남진할
때에 수성인 김칠, 최승규 등 2백여 명이 고려에 귀순하여 고려 건국에 공로가 인
정되어 태조 17년(934년)에 수성군에서 수주(水州)로 승격되었고, 그 뒤 고려 성종
14년(995년)에 지방 관제 개편 때에 수주의 별호를 한남(漢南) 또는 수성(隋城)이라
하고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 8년(1005년)에 혁파되었다.
다시 현종 9년(1018년)에 수주로 승격되어 지수주사(知水州使)를 두었고 원종 12
년(1071년) 수주를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수원군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수주목(水州牧)으로 승격되었으나 충선왕 2년(1310년)에 다시 수원부(水原府)
로 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3년(1394년)에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양
광도에 속해 있던 수원부를 경기도로 편입하고 태종 13년(1413년)에 전국을 8도로
나누며 지방제도를 개혁할 때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으나 중종 21년(1526년)에 부
민 중 부모를 죽인 사건으로 일시 군으로 강등되고 진까지 혁파되어 인천도호부로
옮겨졌다가 중종 30년(1526년)에 다시 수원도호부로 복구되었다. 그 뒤에 선조 8년
(1575년)에 화량진(花梁鎭)을 창설하고 수군절도사가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5년(1602년) 방어사(防禦使)를 겸하여 국방상의 요충지로 삼았음을 알 수 있
다.
오산의 자연 지리적 환경은 풍요한데, 조선 초기부터 국왕은 물론 인물과 물산이
거처가던 주요 교통로이면서 유통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태종의 경우 1406년(태종
6) 3월과 1412년(태종12) 9월 오산 인근지역에 행차한 이후, 1416년(태종16) 2월
오산에 행행(幸行)하여 머물며 강무(講武)를 하였으며, 정종도 10월에 행차하여 매
사냥을 하기도 하였다. 국왕이 오산지역에 행차하는 사례는 세종대에도 이어져서
1433년(세종15) 3월에도 매사냥을 거행하였다. 연이어 4월에도 세종은 광주의 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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