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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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  다종다양한  철기류  및  석제  저울추가  발견된  점을  고려하면  생산,  저장  등의  활

                  동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된다.  유적의  연대는  6세기  후반에서  9세기까지  폭이  넓은
                  편이다.
                    출토  토기  중에는  “井”,  “華山”,  “塩”,  “水”,  “川”,  “卯(卵)”  등의  한자가  음각된
                  것들이  있다.  “水”의  아래에는  “土”변인  것으로  보이는  글자가  남아  있으므로  “수
                  성”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토기의  명문은  신라  경덕왕  19년(759년)에  개명된

                  水城郡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독산성을  중심으로  한  오산  서북부  일대가  화
                  성군  일부  지역과  함께  수성군으로  편제된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전체적으로  오산지역의  신라  고분은  수적으로  많지  않고  분산적이며  위계가  높은
                  무덤이  보이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그나마  횡혈식  석실묘  피장자의  위상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복수의  횡혈식  석실묘가  발견된  예가  없다.  다른  지역에서  횡혈
                  식  석실묘를  중심으로  수혈식이나  횡구식  석곽묘가  주변에  분포하는  양상도  보이지

                  않는다.
                    고려시대  이후는  유물뿐만  아니라  기록으로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2.  문헌으로  본  오산시의  역사  기원






                    문헌상  오산  연혁의  시작은  삼한시대  이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역사학자  이병도에  의하면,  삼한시대  마한∙진한∙변한  등의  15개  소국  가운데의  일
                  부였으며,  이  중  마한은  약  54개의  부족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지금의  오산과
                  수원  화성이  모두  이에  속해  있었던  모수(牟水)국  ∙원양(爰襄)국  ∙상외(桑外)국으로
                  이  중에서도  오산은  모수국(현재의  오산,  태안,  정남,  동탄,  양감,  향남,  봉담,  매송

                  면  일대)에  위치하였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  설은  학자에  따라  위치  비정에  차이
                  가  있다.
                    모수국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의
                  하여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상외국과  함께  매홀군(買忽郡)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

                  뜻은  물꼴,  다시  말하면  습지나  물이  풍부한  땅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또  『삼국사기』권  제24  백제본기  제2  고이왕  5년(AD  238년)  2월조에  의하면  ‘왕
                  은  부산(釜山)에서  사냥하고  50일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많
                  은  역사학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부산이란  지명을  진위(振威)부산으로  해석하고  있
                  으며  진위현  전의  부산현은  현재  오산시  동쪽의  부산동  부근이며,  그  당시  이  지역
                  이  한성백제의  사냥터  곧  군사훈련장으로도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권  제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溫祚王)  11년(기원전  8년)
                  7월조에  ‘독산책(禿山柵)∙구천책(狗川柵)의  양책을  설치하고  낙랑의  침략을  막았다’
                  는  기록과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내물이사금  18년(AD  373년)에  ‘백제의  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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