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5 - 오산학 연구 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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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마구리를 결합하였다. 판면의 평균 두께는 약 2cm정도이다. 비록 연대는 1904년이지만

                116圖(서문, 통문 포함)가 완본으로서 남아있는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이다. 화
                성궐리사의 공자성적도는 목각본과 인쇄본 그리고 근래에 공자의 후손 78세손 공정식에 의해서
                공자성적도를 채색본으로 하여 50폭 병풍도 소장하고 있다. 성적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

                정(1984년)된 이후 공자의 성적도 판각을 소장할 장각(藏閣)이 건축되어 현재 공자문화전시관
                에 보관중에 있다.

                     성적도목판의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한 학술심포지엄(2019년)에서 기호철
                은 궐리사성적도 목판이 우리나라 최초의 목판본으로 널리 배포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대중에게 보급된 효시로서 가치를 언급하였다. 또한 박광헌은 ‘궐리사 성적도’가 ‘궐리사 공부자
                                                     43)
                성적도 책판’으로 변경되어야 함을 지적하며  국내에서 온전하게 보존된 거의 유일한 목판으
                로, 목판 원형과 판화를 보존할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4. 결론


                 “오산시궐리사(烏山市闕里祠)”라는 문화재 명칭은 1994년 4월 20일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

                로 지정될 때 붙여진 명칭이며, 이는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건조물) 지정명칭 부여 지침”
                에 따라 제3조 공통적인 부여원칙 제1항에 따라 “시·도, 시·군·구 + 문화재”의 지정명칭 부

                여 기준을 따른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고유명사를 가지고 있으나 다른 지역에도 있을 수 있어
                지역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는 문화재에 부여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오산시궐리사(烏山市闕里
                祠)’의 명칭은 오산이 지난 1949년부터 화성군(華城郡)에 속해 있었으며, 1989년에 이르러서야

                화성군에서 벗어나 오산시(烏山市)로 승격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정조는 왕권강화책으로 신도시 건설을 화성(지금의 수원)에 추진하면서 이곳이 중

                종 때 경기감사와 대사헌을 지낸 공서린(孔瑞麟)이 기묘사화 후 낙향해 후학을 양성하던 서원의
                터임을 알게 된다. 이후 수원부사에게 명해 그 터에 사당을 건립하게 하고 공자의 유상을 보내
                봉안하도록 했다. 화성 궐리사가 세워지기 전에 이미 충남 논산 노성에 궐리사가 있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화성 궐리사를 창건한데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조정의 허락 없이 노론
                신하들에 의해 건립된 노성의 궐리사를 혁파하고, 국가가 공식적으로 건립한 궐리사를 통해 백





                43)  오산시, 2019, 「오산시 화성궐리사 소장 『공부자성적도』책판의 현황과 특징」, 『오산시 화성궐리사 성적도 문화재적 가치와 의
                  미』, p.57.


                                                “오산시궐리사”와 “궐리사성적도” 문화재 명칭에 관한 제언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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