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5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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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는 원효를 神僧으로 기록한다.
신승 元曉가 成道한 장소를 직산(樴山)의 寓▨▨▨▨으로 기록한다.
《宋高僧傳》 〈義湘傳〉은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를 본국(本國) 해문(海門) 당주계(唐州界)로
기록한다. 당주계에 이르러 창파를 건널 거함(巨艦)을 찾아다니던 條於道中에 苦雨를 만났고,
고우를 피하여 토감에 들었다가 龕墓不二와 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록한다.
토굴무덤에서 성도한 원효는 남한강변에 두 개의 사찰을 개창한다.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
寺)와 월악산신륵사(月嶽山神勒寺)이다. 비문에 따르면 신라인들은 성도한 원효를 神僧으로 불
렀고, 사찰의 이름에 따르면 원효는 자신을 神勒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원효와 의상이 머무른 당주계(唐州界)는 당항성(党項城)의 바닷가였다. 지금의 경기도 화성
시 남양만이었다. 당항성에는 당성(党城)과 당항진(党項津)이 딸려 있었다. 당성은 당항성의 주
장성이었고, 당항진은 신라의 대당포구였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당항성과 당항진의 이름은
당은군(唐恩郡)과 당은포(唐恩浦)로 바뀌었다.
당항성과 당항진은 대당외교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의 사신 유인궤와 신라의 사신
김삼광, 김인문 등이 당항진을 통해 당과 신라를 오고 갔다.
당성(党城,唐城)은 두 차례에 걸쳐 축성되었다.
1차성 당성(党城)은 구봉산과 봉화산을 잇는 남서능선 정상부에 축성되었다. 길이 약 600m로
6~8세기의 신라와 통일신라의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2차성 당성(唐城)은 길이 약 1.2km로 1차성의 중심부를 관통하여 구축되었다. 구봉산 계곡을
감싸는 포곡식 산성으로 신라∼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의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당성이
시대의 역할과 필요에 따라 폭 넓게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
〈義湘傳〉의 본국 해문 당주계는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청원리의 해문(海門) 과 화성시 남양읍
2)
장덕리의 해문역(海門馹) 을 가리킨다.
본고는 원효와 의상이 오고간 당항진로(党項津路)와 원효가 성도한 당주계 직산(樴山)의 토굴
무덤을 밝히는데 그 목적을 둔다.
1) 海門, 남양도, 18세기 후반, 31×42cm, 정신문화연구원 소장.
2) 海門馹, 남양지방도, 동여비고, 1682년, 33×42cm, 양산 대성암 소장.
원효가 成道한 당주계 樴山의 토굴무덤 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