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1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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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라 하였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안거할 수 없으므로 돌아와 위례성을 보았는데 도읍이 안
정되고 백성이 편안한지라 참회하여 죽으니 그 신민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올 때에 백성(百家)
이 모두 즐겨 따랐으므로 후에 국호를 백제(百濟)라고 고쳤다.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한 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로써 성씨를 삼았다.
3) 백제 건국의 이설
11)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기록된 백제 건국의 이설 은 다음과 같다.
시조는 비류왕으로서 아버지는 우태(優台)니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이고 어머니는 소서
노(召西奴)니 졸본인(卒本人)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
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으로 돌아와서 과부로
지냈다. 그 뒤 전한, 건소 2년 2월에 주몽이 남으로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
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취하여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처음 소서노는 주몽의 건국에 내조의 공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주몽의 총애가 특히 두터웠고 비류
와 온조도 자기 친아들 같이 대우하였다. 그런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유류(孺
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온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여기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가재를 기울여서 도와
방업을 이룩해 그 근로가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싫어하자 나라는 유류의 것이 되었으니 우리는 한
갓 혹과 같이 답답할 뿐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떠나 남쪽의 복된 땅을 얻어 도읍을 여는 것
만 같지 못하다.’
마침내 비류는 아우 온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예성강)와 대수(帶水,임진강)를 건너서
미추홀(彌鄒忽,인천)에 정착했다.
4) 백제 건국의 정설과 이설의 재해석
삼국사기 백제 건국의 정설과 이설을 필자의 시각으로 정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1) 백제 건국의 이설, 삼국사기(하), 전게서, 11쪽.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의 정체에 대한 小考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