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7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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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역말 청호역에는 당시 중마을에 날이 어두워지면 커다란 사랑방에 과객이나 등짐장수
들이 아무 때나 가리지 않고 이곳에서 하룻밤을 편히 쉬고 가도록 시설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며 지내기도 하였다 한다. 그래서 중마을 사랑방에는 전국 어디를 가서
보아도 윗목에는 머리때(?)가 진하게 베인 목침과 돌베개가 100여개 이상 쌓여 있었다한다.
그리고 이 사랑방에는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 있는데, 사방 벽을 보면 검은 줄
이 삥 둘려있는데, 그것은 많은 투숙객들이 잠들기 전 벽에 기대서 이야기할 때 앉아서 머리를
비빌 때 묻었던 머리때가 몇 년 동안 겹쳐 묻은 자국이 그렇게 보였다 한다. 그 당시 역촌 관리
인 말로는 찾아오는 나그네마다 나무나 돌을 가지고 와서 베고 갈 때는 그냥 갔다고 한다. 오
산의 옛 역인 청호역은 고려시대에는 충청주도에 속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양재도, 영화도
에 속하였다. 오늘날 원동에 있었으며, 구체적으로 역말저수지 동쪽 편 역말약수터 부근에 있
었다. 지금은 청호역의 흔적은 없고, 한때 역의 흔적은 지명에만 남아 역말이라는 마을 이름으
로 남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일제시대 청호역은 오미역, 성호역으로도 불리웠다는데, 병점
(떡점거리)역마로부터 이곳 오미역마(청호역)를 거쳐 진위역마(진위면 견산리)로 향하였다고
한다. 기록에는 당진 피(皮)씨 네가 대대로 역마를 먹였다고 하는데, 역말저수지에는 당진 피
씨네 조상이 한강에서 역류하는 돌 2개를 안고 와서 당신(堂神)으로 모셨다는 당집이 있다. 돌
크기는 각각 약 30cm 높이로서 자그마한 할아버지 선돌 모양이라고 하는데 그 당시 당집이
허물어져 무너진 기와지붕 밑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당제는 음력 10월 초승에 행하였고, 최근
에는 당제는 지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고대로부터 우리나라 육로 교통의 중심지역인 오산. 1905년 경부철도 개설 때에도
오산역이 함께 개설되었고, 현대에도 경부고속국도의 최초 개설 구간(서울-수원-오산)으로
톨게이트가 함께 설치되었으며, 그 톨게이트의 위치가 청호역 자리 근접 인근이다. 현재 오산
의 교통은 전철, 기차, 버스 노선이 필수적으로 경유해야하는 한마디로 ‘사통팔달’이 한 단어
로 표현할 수 있는 고장이 되어있다.
참고문헌
* 오산시사편찬위원회, 『오산시사 제1, 2, 3권』, (주)북멘토 2009.
* 김동복, 『옛수원 새수원』, 이화문화출판사, 2011.
* 수원시사편찬위원회, 『수원시사 상』, (주)경기출판사, 1996.
* 남경식, 『오산역사문화』, 우리동네사람들, 2013.
새롭게 기억하고, 기록되어야 할 오산이야기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