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3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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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산시의 옛 육로 교통과 청호역(菁好驛)


                  현재 역이란 철도를 갈아타고 내리는 곳으로 의미가 축소되었지만, 옛날엔 역은 바로 출발
                지와 종착지, 그리고 중간기착지에 설치된 일종의 공공기관을 말한다. 중앙과 지방의 행정문

                서를 전달하고, 공공기관에 필요한 물자를 운송하며, 국내외 사신의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를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행자에게 숙박의 편의를 제공하던 교통, 통신기관의 하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역이 처음 개설된 것은 신라 소지왕 9년(487)
                으로 알려져 있으며, 관원도 배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늦어도 5세기 후반에는 신라에
                역제가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정비된 신라의 우역제는 이후 신라의 강역 확장과 함

                께 계속 발전하였다. 고구려에서도 구체적 기록이 없어 단언하기 어려우나 고구려 멸망 후의
                간접 기록이기는 하나『삼국사기』 지리지에 첫 수도인 국내성에서 후기 수도인 평양까지의 거
                리가 17역이라 밝힌 기록으로 보면 역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삼국시대와 남북국시

                대에 역이 설치, 운영되었을 개연성은 높으나, 그것이 어느 지역에 배치되었는지는 아직 정확
                히 알 수 없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수원지역도 신라 영역에 포함되었다. 신라의 대중국 활동은

                남양만의 당은포가 주로 이용되었고, 오늘날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남아있는 당성은 바로
                당은포를 관할하던 군진 성일 것이다.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화성의 당은포로 가는 길은 어떠

                한 노선과 방법을 택하더라도 독산성이 위치한 오산을 포함한 수원지역을 지났을 것으로 보인
                다. 따라서 이 지역에 역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은 높다고 보겠다.
                  삼국 및 고려의 역제는 궁예의 태봉국을 거쳐 고려시대에도 계승되었다. 고려의 역제는 끊

                임없이 정비되었고, 12~13세기경에는 22역도라고 하는 전국적인 역로망을 구축하였다. 모두
                525개소의 역을 지역에 맞추어 22개의 단위로 구획했다. 이처럼 지역별로 구획된 역로는 최종

                적으로 개경을 지향하였고, 따라서 충청 이남에 설치된 각 역도는 대개 수원(오산), 광주 지역
                을 거쳐 가기 마련이었다. 오산이 속한 수원지역은 수원에서 각각 충남 부여와 충북 청주에 이
                르는 충청주도에 속하였다. 당시 수원지역에는 동화역(同和驛), 장족역(長足驛), 청호역(菁好

                驛) 등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들 역에 대한 운영은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이 세 역 모두 충청
                주도에 속하였다. 이로써 함흥까지만 개설되었던 고려의 역참은 개성에서 부산으로 개통되는
                국도가 생겨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경원지역까지 확대되고, 조선조 때 각도별로 구간을 정

                해 구간별 책임자인 역승(驛丞)이 관리토록 하였다.
                  조선의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즉위교서를 통해 당시의 문란한 역 운영을 지적하면서 공공 업



                                                           새롭게 기억하고, 기록되어야 할 오산이야기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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