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6 - 오산시 지명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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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리의 옛 지명으로 뱅골, 뱀골 등으로 불렸으며 예전에 뱀이 많은 골짜기라 하
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 박영효별장(터)
박영효 별장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실제로 구한말 철종
의 부마(영혜옹주)였던 박영효의 별장(은계동 64번지, 1960~1970년대 유림각호텔
과 주변 터, 지금의 황덕사 부근)이 이곳에 있었는데, 현재는 다세대주택(금성타운)
이 들어서 있다. 박영효가 죽고 난 뒤에도 그 며느리가 이곳에 오면 동네 사람들을
위해 며칠간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그때 은계동 남쪽 오산천의 백사장 모래밭에서
모래찜질을 즐기면서 놀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 별장에는 고추장과 간장 등이 담
긴 한 길 넘는 항아리가 수백 개가 있었다고 한다. 필자가 2002년 박영효 별장을
관리하던 분의 가족(손자)을 통해 채록,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박영효 별장은 양철
지붕으로 된 단층이었고, 방이 네 개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을 궐집 또는 궁집
이라 불렀다 한다. 그 집은 1957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대문은 솟을대문으
로 대한문을 본떴는데 크기는 대한문의 3분의 2였다니 대단히 웅장하고 컸다. 별장
은 정원을 곁들였는데 2천여 평이 넘었다고 한다. 박영효는 중국인을 고용하여 앞
텃밭에 토마토를 재배하였다. 1919년 3월 오산독립만세운동 때에도 이 마을에는
일본 경찰이 얼씬도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오산독립만세운동에 가담했던 마을
사람들은 모두 무사했다 한다. 지금 천태종 황덕사가 있는 곳이 마구간 자리였고
한 번에 대여섯 필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한다. 그가 말년에 낙향하여 직접
마을 사람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집 안팎일을 보살폈는데 품삯은 후했다고 한다.
별장은 정원이 아름다웠는데 청단풍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그 당시 이 나무는 아주
귀한 나무였다고 한다. 그 나무를 중심으로 로타리를 만들었고, 울타리는 구기자와
산수유를 심었다 한다. 박영효가 그곳에 머물 때는 뒷산에서 일본 경찰이 보초를
설 때도 있었다 한다. 뒷산 너머에 그의 과수원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박영효
의 과수원이 있던 그 자리를 박동이라 불렀다. 현재 필봉산 남서쪽 입구 쪽이 되겠
다. 지금 한호빌라가 있는 뒷산과 상수도 물탱크가 있는 자리로 과수원 면적은 상
당히 넓었다 한다. 박영효는 철종의 부마로 갑신정변의 주역이었으며 조국의 개혁
을 위해 힘쓴 혁명가였으나, 대한제국이 망한 후에는 일본 작위를 받고 친일의 길
을 걷게 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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