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7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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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각종 교육기관, 기타
오산지역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한글교육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성모(李聖模) 씨는 여름방학 기간에 오산 근방에 산재한 무산아동들에게 한글을 가르
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오산야학당에서는 남녀학생 50명이 공부를 하고 있다고도
보도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 삼미의숙(三美義塾)은 1922년에 설립되었는데 “無産兒들 中에도 極貧으
로 就學치 못하는 者에게는 그 學父兄에게 小作地를 엇어주어서 그것의 收穫으로 學費를 充當
케 한다.”는 기사가 실린다.
그리고 오산지역에서는 매우 특별한 학예회가 펼쳐졌던 것으로 보인다. 오산공립보통학교에
서는 여름방학에 남녀학생 20여명이 30여 종에 달하는 가극을 연습하고 준비하여 일반시민을
위로하는 대회를 개최하였다고 한다.
또한 ‘樓邑團(누읍단)’의 주최로 연합학예회가 개최되었다는 기사도 보인다. 누읍단(樓邑團)은
누읍리, 가수리, 탑리, 두곡리, 벌음리 5개 마을의 연합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지역민들의 후원
으로 경비를 마련하고 27종의 학예작품을 선보였다는 내용이다.
Ⅴ. 나오는 말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에게 너무도 큰 시련을 안겼다. 교육이 문제로부터 전통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 가운데에서도 언어 말살 정책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훼
손시키고 자존감을 무너트리는 계기였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 민족은 한글을 지켜내고 민족정신을 계승하고자 다양한 저항운동을 전개
하였고 그 가운데 한글의 보급을 통한 교육 운동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판단한다.
오산지역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학교의 설립과 운영은 조선총독부의 지침을 받아 시행되어
야 했으며 교과의 내용 등 교육 전반이 검열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어려운 여건에도 불
구하고 오산지역의 교육은 민족의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단합되었다.
오산지역 교육의 현황과 특징(1908~1949년) 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