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4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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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1913년 오산공립보통학교가 청호면 오산동에 설립되었다. 1923년에는 사립학교로 대성
학원 설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사를 통해 확인된 1918년 烏山公立尋常小學校, 1928년
烏山公立農蠶實修學校의 설립 시기에 대하여는 확인이 필요하다. 이를 통하여도 오산지역의 교
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청년동맹에서 운영하고 있던 야학을 비롯하여, 삼미리의 해평윤씨 집안에서 설립한
삼미의숙 등 무산계층의 자녀를 위한 학교에 준하는 교육기관과 교습소 등이 활발하게 운영되
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교육 시설의 부족으로 인한 것도 있으나 오산지역의 교육열과 교육에
대한 오산지역민들의 열의를 함께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그리고 특히나 형편이 어려운 가정
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고자 한 점등이 오산지역의 교육 철학과 운영의 방향을 보
여주는 것이라 판단한다.
2) 학교의 운영
학교의 운영은 일제강점기인 만큼 교육의 내용과 방향에 대한 오산지역민들의 저항정신을 엿
볼 수 있었다. 특히나 “오산공립보통학교(烏山公立普通學校) 동맹휴학” 등의 사건은 훈도인 고
산(古山)이 학생들에게 항상 "너의들은 야만(野蠻)이라"고 하였으며 이에 분개하였던 학생들이
순종 황제 성복날에 망곡을 하려고 하자 제지 당하고 게다가 박승도(朴聖道)라는 학생을 구타하
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고산을 해임하기 전까지는 등교를 거부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
고 ‘칙어’가 분실되어 수사를 진행한다는 기사를 통하여 일제에 대한 반항의 의미이며, 항일의
의지를 표명한 사건이라 하겠다. 이를 통하여 당시 오산주민들의 저항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각급 학교의 운동회에 대한 소식도 실렸는데 오산공립보통학교의 경우 학생 일천
명과 학부모 등 팔천여 명이 운동회에 참석하였다는 기사였다. 그리고 ‘우량학생표창’을 하는 이
유 중 하나가 천황의 성혼을 기념하는 것이라는 기사도 있었다. 그러니 단순히 학생들을 응원하
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제의 치적을 쌓으려는 의도에서 표창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농번기를 기하여 휴교를 하였다는 것은 지역민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학기의 운영
을 탄력적으로 진행하였음도 확인된다. 그러나 오산지역민들의 분노를 표출시켰던 사건으로 학
기 중의 학생들에게 소똥을 줍도록 하는 사건도 있었다.
342 김용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