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5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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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입학과 졸업생 현황과 동창회



                 1928년 오산공립농업보습학교의 정원은 30명인데 지원자는 14명에 그쳤다. 아직도 학교에
                진학하기에 여러 형편이 녹록지 못하였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지원자의 나이를 보면 근 10살의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 눈에 띈다.
                 같은 해인 1928년 농잠실습학교의 경우 입학정원보다 많은 지원자가 몰렸다. 지원자 가운데

                약 56%만이 입학한 것으로 나타난다. 단순 농업(농업보습학교)보다는 보다 전문적이고 수익 면
                에서도 양호하였던 잠업(蠶業) 분야에 지원자가 훨씬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양잠(養蠶)이 인기 학교이고 인기 학과였던 셈이다.

                 1928년 졸업생들의 입학정원이 몇 명이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나 1928년 입학생의 정원을
                참작한다면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약 30명의 입학생 가운데 단 11명만이
                졸업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로 보아 여하의 사정으로 인하여 입학은 하였지만, 졸업하지 못하

                는 학생의 비율이 60%를 상회하였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리고 졸업생의 대부분은 가업으로 농
                사일을 하였고, 관공서에 취직한 1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9년 오산공립농잠실습학교의 입학정원은 1928년 30명에서 50명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지원자의 수가 1928년보다 줄었음이 확인된다. 1930년에는 1928년 30명이 입학하여 10명의 졸
                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농업기술과 농잠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입학지원자의 수는 꾸준하나 정

                작 입학을 하였더라도 졸업까지 이르기는 여러 사정이 여의치 못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로 보아 1920년대 말, 오산시의 교육 여건은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던 것으로 보인다. 보통
                학교의 경우에는 여러 형편상 입학을 희망하지만, 지원조차 어려운 상황이라 짐작이 된다. 그리

                고 초등학교의 경우는 학령기 연령 아동의 수에 비하여 수용인원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임을 보
                인다. 아마도 이러한 여러 상황으로 하여 사립학교가 설립되고 있으며 시민들과 각 단체가 한글

                학교를 운영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 후원회 활동



                 오산공립보통학교후원회의 활동내용을 보면 ‘문고의 설치’와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
                금을 지급’하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수업료를 감하고자 하는 운동이 전개되었음도 확인

                된다.
                 광성학원에서는 창립 1달여 만에 후원회를 조직하였다. 성호공립심상소학교(水原郡城湖尋常



                                                           오산지역 교육의 현황과 특징(1908~1949년)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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