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6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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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學校)에서 후원회에서는 “부형 모자 접대 다과비(茶菓費)를 금년부터 영년 페지하고 절약의
일부분의 금액으로는 한해 구제 급식 아동 오료(午料) 비용에 충당하기로 가결”하였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1949년에는 고등공민학교로 출발하였으나 지역의 유지인 “최병국(崔秉國)씨가 사유토
지 一만三백二十五평을 희사한 것을 비롯하여 토지와 현금을 희사하는 유지가 속출”하는 등 지
역교육에 열의로 정식 중학교인 오산중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기성회가 조직되었다는 기사가 실
렸다. 삼미의숙의 경우도 그러하고 오산중학교의 설립과정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오산지역민
들의 교육에 대한 열의를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판단한다.
4. 기탁금
기탁금은 각급 학교의 후원회 차원에서의 교육지원이 아닌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후원을
다루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오산지역의 교육에 대한 실질적 지원 활동을 확인할 수 있기 때
문이다.
수원청년동맹 오산지부(水原靑盟烏山支部)에서 경영하는 노동학원의 경우 운영상의 어려움
이 발생할 때마다 지역민들의 후원이 답지하고 있었다. 1930년 당시 백여 명의 무산아동을 교
육시키고 있던 야학의 어려움을 듣고 김종두(金鍾斗) 씨는 금일봉을, 김현숙(金顯叔) 씨는 종
(鍾)을, 박부산(朴富山) 씨는 석탄을 기증하였다.
사학인 광성학원의 경우 세교리 출신의 원제완(元濟完-25세 : 1940년) 씨는 학생 가운데 극
빈자로 정학(停學)의 처지에 놓인 열 명에게 학자금을 대납하고 “신학기분부터 금十원을 학원으
로 보내고 앞으로도 극빈한 생활로 인하여 정학을 당하게 되는 아동이 잇거던 바로 기별하야 주
면 전부 자기가 담당을 하겟다”는 기사가 실렸다.
해평윤씨 종중에서 설립한 삼미의숙도 지역의 무산자계층의 자녀들을 위하여 교육기관을 설
립하였음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소작농들에게 자녀 교육을 먼저 시키고 품삯으로 교육비를
내게 함으로써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렇듯 오산지역에서는 교육의 기회가 없던 극빈 무산자계층의 자녀들이 학업 할 수 있도록
학교의 설립과 학자금의 지원 등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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