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0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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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적사라는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어느 옛날에 보릿고개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노부부가 있었다한다. 먹을 것이
라고는 겨우 쌀 두 되만이 남아 있었고 식량을 구할 방법도 없어 굶어 죽을 지경에
처하였다 한다. 노부부는 밥 한술 먹고 며칠을 더 사느니 차라리 이 쌀을 부처님께
공양하여 좋은 일이라도 하고 죽자고 결심하였단다. 그리하여 쌀을 부처님께 바치
고 집에 돌아와 보니 비어있던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노부부는 이것
을 나한님의 신통력이라 여기고 더욱 치성을 올리게 되었고 이후로 보적사란 이름
이 붙었다는 전설이다.”
보적사는 남한산성의 장경사나 북한산성의 중흥사처럼 군진 속에 있는 사찰이다.
따라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군사들에게 부처님의 가호를 빌어 주는 등 사기앙양
에 기여했을 것이다. 향토사학자 임종삼은 독성려왕릉의 주인공으로 비정한 백제
제16대 진사왕의 원찰로 보기도 한다. 독산성에는 2천 명이 넘는 군사가 배치되어
있었고, 이 가운데에는 승군(僧軍)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승려들이 성
을 지키는데 힘이 되는 정도가 혹 산성의 병정보다도 나을 때가 있음을 익히 알았
기 때문이다.
이상의 승려가 상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승군의 치영으로서 보적사의 역할이 중
요하였던 셈이다. 순조 연간인 19세기 독산성 성내 126호, 성외 127호가 살고 있
었다. 이들의 신앙 공간으로서도 보적사는 존재 의미 정조 이후 순조 연간 용주사
와 마찬가지로 독산성에는 승군이 편재되어 있었다. 당시 승군은 103명으로 보적사
6명, 용주사 85명, 만의사 12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적어도 보적사에는 6명
가 있었던 셈이기도 하다.
보적사 약사전은 정조가 용주사를 건립할 당시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0년 주지였던 주대식스님이 약사전을 헐고 현재의 대웅전을 지었다고 한다.
또, 보적사는 의병활동의 거점으로 활용된 곳이기도 하다. 1907년 7월 서울 사는
김재선(金在善, 24세), 송주상(宋柱祥, 22세), 김태동(金泰東, 20세) 등은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신문 등을 통해 접하고 의병에 가담할 뜻을 갖고
독산성의 보적사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수원사람 강춘선을 만나 용인의 남상목(南
相穆) 의병부대에 합류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남상목 의병대는 충북 음성에서 일
본군과 전투에서 패퇴하여 의병 30여 명과 더불어 죽산 칠장사에 도착하여 100여
명의 규모를 지닌 전봉규(全奉奎)·민병찬(閔丙贊) 의병진에 합류하여 안성을 함께
공격하고 있다. 이렇듯 독산성 보적사와 죽산 칠장사 등의 사찰은 의병의 근거지이
자 일본군 공격을 위한 둔취장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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