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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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세람교의 위치를 모르다가 2006년 서수원-오산-평택간 고속도로 건설 송산
I.C구간 교량공사 도중 발견되어 지금은 그 위치를 알게 되었다. 결국 세람교 자리
에 고속도로 교량이 놓여지게 된 것인데, 예나 지금이나 다리 위치는 누가 놓아도
그 자리에 놓여지는 것을 보면, 땅도 타고난 제 역할(운명?)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
이 든다.
독산성은 조선시대 왕이 행차하던 곳이기도 하다. 인조, 영조, 사도세자(장헌세자,
훗날 고종 때 장조로 추증), 정조 등이 독산성을 친히 점검한다. 이렇듯 독산성은
국가의 큰 관심 속에 있었다.
독산성 남문. 지금은 진남루라 불리는 누각과 성문은 사라지고 없다. 독산성에서는 가장 큰 문이다.
이 성에는 사도세자와 정조의 사적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독산성에는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인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에 얽힌 이야기가 전
해진다. 잠시 이야기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독산성의 주 통로였던 남문에는 누각이 있었는데, 누각 이름이 진남루(鎭南樓)였
다. 현재 이 누각은 훼손되어 없어졌다. 1760년(영조 36년)에 온양온천 행차 후 환
궁하던 사도세자가 독산성을 휘감고 흐르는 황구지천의 세람교가 장마로 범람하여
황구지천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독산성 안 남쪽에 있는 운주당(運籌堂)에서 하루 유
숙하게 된다(경진년경숙 庚辰年經宿). 이날 사도세자는 성안의 부로(父老)들에게 질
고(병고)를 묻고 창고의 곡식을 출연하여 하사하였으며, 진남루에 올라 활 1순(5발)
을 쏘아 연달아 4발을 얻었고 다음날 아침에 독산성을 떠났다 한다. 그로부터 30년
뒤 1790년(정조 14년) 2월에 정조는 융릉(사도세자 릉) 원행 때에 서문을 통해 독
산성에 올라 운주당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경진년 사적을 살피게 된다. 이날 정조
는 성안의 부로들을 부르고 무엇으로 생계를 이어가는지 물었으며, 또 성안의 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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