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8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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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위로하고  명을  내려  승속(僧俗)과  나이를  불문하고  이들에게  특별히  경진년경

                  숙때보다  한  자급을  더해주고  성안의  민호마다  쌀포대를  지급하게  하였다.  장병들
                  에겐  승진과  시상을  하였다.  그리고  이  남문의  진남루에  올라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억하고  아버지의  위민정신을  기리고,  백성을  위한  위민정치를  실천하고자  다짐하
                  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사도세자는  조선의  영명한  군주가  되어  자신을  찾아온
                  아들  정조를  이곳  독산성에서  영혼으로나마  부자  상봉을  하게  된  것이다.  정조는

                  이곳에서  가슴에  맺힌  아버지에  대한  아린  한을  풀어내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추
                  념했다  한다.



























                                                   독산성  남문  진남루  터



                    독산성은  정조  때  수축을  다시  하고  공역을  시작할  때  토지신에게  올리는  고유제
                  를  지내도록  하였다.  정조는  고유제의  절차와  참여  인원까지  직접  지시하고,  고유문
                  을  직접  지었다.  수원부사를  헌관으로  삼고,  중군과  읍내  당상관을  지낸  조관(朝官)

                  을  아헌과  종헌으로  삼았다.  현재는  오산독산성문화제  때  약식으로  재현  천신제로
                  변경  시행해  오고  있다.
                    경기  남부  군사  행정의  중심지였던  독산성은  성  내에  수백  호의  민가가  거주하는
                  생활공간이기도  하였고,  15개  건물에  167칸이  넘는  관청이  들어서  있던  곳이기도
                  하였다.  현재는  보적사,  세마대  2곳만  남아  있다.

                    현재  독산성은  복원을  위한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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