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5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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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화성궐리사 은행나무, 수령이 근 500년(470년)으로 추정된다
정조가 신도시 조성 계획을 위해 1794년 화성성역사업을 착수하기 2년 전인 1792
년(정조 16년)에 수원(화성) 고적을 탐사하였는데, 화성부 중규면 구정촌이 중종 때
경기·황해감사와 대사헌을 역임하고 기묘사화의 명현으로 이름난 공서린이 낙향하
여 후학을 양성하던 서원의 유허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정조는 오산화성궐리사를
개설하기 위해 공자의 후손을 우대하는 방안을 마련하라 지시하고 공서린에게 문헌
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1792년 당시 기백은 왕의 전교를 받고 화사를 보내 문헌공의 옛터와 서재, 그리고
우물을 도형하고 새로 자라나는 은행나무를 그려 갔으며, 같은 해 10월 7일 화성부
사가 비장을 파견해 정당의 방위를 자좌(子坐, 북쪽을 등지고 남쪽으로 건물을 배
치함)로 정하고 다시 비장 박동철과 가의 이원형을 감독관으로 삼아 정당 터를 개
토함으로써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다음 해인 1793년 4월 2일 정당의 수주 상량을 시작으로 동서재와 내삼문 그리
고 외정문과 정당 감실을 완성하고, 1793년 6월 20일에는 공자의 영정 대 1본을
평택 광덕 영당에서, 소 2본은 내각에서 배봉하였다. 이로부터 매년 동·하절기에 예
조에서 관상감에게 명해 3월과 9월 상순으로 택일해 어제 축문과 봉향을 하사하여
춘추로 석전을 봉행토록 하였다. 현재도 춘계, 추계에 석전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2) 서원 훼철과 복원
1871년(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다시 1900년 나라의
승인을 얻어 성묘를 중건하였다. 1901년 이래로 여러 차례 강당이 재건되었다. 현
재 건물은 1981년에 다시 지어졌으며, 그 후 삼문·홍살문·공부자전시관·양현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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