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0 - 오산학 연구 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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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문헌상에는 삼남대로의 노선을 따라간 인물들의 행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삼남대로와 관련한 기록 외에 오산지역에 대한 기록은 여러 문헌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
히 오산장 및 독산성 내의 사창과 오창 등 물자의 유통과 관련된 장시와 창고가 오산지역 일대
에 설치·운영되었다는 것은 오산지역이 교통·유통의 요충지였음을 강력하게 증명하고 있으
며, 농업의 근간이던 벼농사를 발전시키기 위한 종자를 파종하는 방법을 실험하는 장소로도 활
용된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태종 13년(1413년)에는 오산지역 일대인 수원부가 도호부로 편성되고, 경기도의 감영이 설치
되었다는 점에서 이 일대가 국가적인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오산에 위치한
독산성을 사수해 결과적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능행로와 세람교
정조대에 들어 삼남대로의 길목에서 오산지역은 더욱더 중요한 거점지역으로 자리하게 되는
데, 이는 현륭원(顯隆園, 융릉(隆陵)의 옛 이름) 및 화성행궁의 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
조13년(1789)에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배봉산 자락(現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옛 수
원부 읍치 자리로 이전하였고, 정조는 화산(花山)에 현륭원을 조성한 이후 여러 차례 능행길에
올랐다.
사도세자의 묘소를 천장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 원소로 가는 도로 노선에 대한 기록
이 나오는데, 이 기록에는 각 지점 간 거리는 물론 노선 내에 있는 다리 및 수로에 대한 현황까
지 세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기록을 토대로 노선과 주요 다리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면 [표 4]와
같다.
기록에 따르면 기존 원소에서 새 원소까지는 총 120리로, 현륭원으로 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세람교(細藍橋)”를 건너게 되며, 실제로 천장 시에 이 세람교를 건넜던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12)
. 이 세람교에 대한 흔적은 여러 고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그림5~7].
12) 『일성록』 정조13년 기유 10월 7일
“평융복(平戎服)을 갖추고 교(轎)를 타고 행궁(行宮)을 나갔다.…상유천(上柳川)과 하유천(下柳川), 세람교(細藍橋)를 거쳐 재
실(齋室)의 앞에 이르러 교에서 말을 풀고 재실로 들어가니, 안개가 깨끗이 걷히고 해가 환히 비추었다.”
188 강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