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4 - 오산학 연구 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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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시대의 도로 제도



                조선시대에는 건국이후 신진사대부 개현세력들은 통치이념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예치사상을
               반영한 새 도시건설과 함께 도로를 정비하였다.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한 후 『주례(周禮)』에 근

               거해 1393년(태조2) 도성의 공사를 시작하여 1394(태조3)에 종묘사직과 궁궐 및 시장터를 정하
               였으며, 1393년(태조2)2월 에는 조운의 편리 유무, 도로 노정의 험난함과 평탄 여부를 조사하게
                    4)
                                                                                   5)
               하였고 , 1394년(태조3) 9월에는 정도전 등에게 한양의 도로 터를 정하게 하였다 . 1407년(태
               종7) 4월에는 한성부에서 올린 조목에 따라 5부 각 방의 이름과 교량 및 거리의 이름을 세우도
               록 조치하고, 여리의 각 도로도 민가가 도로를 침범하지 않도록 닦고 넓히도록 하였다. 1414년
                                                                               6)
               (태종14년) 10월에는 각 지역별로 조세 납공 기한을 계산하기위해 도로에 후자 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도로에 대한 대책은 1426년(세종8)에 도성의 도로 폭을 규정함으로서 대로(大
                                                                    7)
               路)는 7궤, 중로(中路)는 2궤, 소로(小路)는 1궤로 구체화되었고 ,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성
                                        8)
               내 도로 규정이 제도화 되었다 .

               3. 삼남대로의 등장



                조선 후기 도로에 대한 관심이 확장됨에 따라 다양한 지리 관련 서적이 등장한다. 1770년 신
               경준의 『도로고(道路攷)』, 1770년 영조의 명으로 편찬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19세기

               초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산리고(山里考)』, 19세기 중엽 『기봉방역지(箕封方域志)』, 1866년
                                                                          9)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 1908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이며, 이들은 세부적
               인 내용에는 차이가 있으나 공통적으로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망을 제시하고 있다.




               4) 『태조실록』권3, 태조2년2월9일 갑신
               5) 『태조실록』권6, 태조3년9월9일 병오
               6) 도로의 이수(里數)를 기록하기 위하여 길가에 설치하던 흙으로 쌓은 단으로, 10리(里)마다 소후(小堠)를 30리(里)마다 대후(大
                堠)를 설치하였다.
               7) 『세종실록』권32, 세종8년4월5일 무진
               8) 『전록통고』 공전 교로
                 “도성(都城) 안의 도로(道路)·도랑溝渠·다리橋梁는 공조(工曹)와 한성부(漢城府)에서 살펴 수리한다.
                 대로(大路)는 너비가 56尺이고, 중로(中路)는 16尺이며, 소로(小路)는 11尺이다. 양 옆의 도랑은 너비가 각각 2자이다.-영조척
                (營造尺)을 사용한다.- ….“
                 “지방의 도로는 10리마다 소후(小堠)를 세우며, 30리마다 대후(大堠)를 세우고 역(驛)을 설치한다.-후(堠)의 표면에는 이수(里
                數)와 지명(地名)을 새긴다.-”
               9) 1770년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을 보편하여 간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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